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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대형교회의 축복과해독

21세기의 교회의 노래를위한의미

1831년에토퀘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은 젊은 미국으로의 많이 알려진 여행을 떠났다. 그의 관찰이 오랫동안미국문화역사의 주된 주제였던이 예리한불란서 여행자는특별히미국의 종교현상에대하여호기심을 느끼게되었다. 그는다음과같이 기록하고있다: "기독교가미국에서보다인간의 영혼에더큰 영향을 끼치고있는곳은 이 세상 아무 데도없다." 그는미국에서 종교가상당히두드러진다는사실 뿐 만이 아니라, 그종교의 특징에의하여놀랐던것이다. 그는계속해서 이렇게말하고있다: "프랑스에서 나는거의 언제나 종교의 정신과자유의 정신이 서로반대의 방향으로행진하는것을 보아왔다. 그러나 나는미국에서 그들이 친밀하게연합한것과함께 같은 나라를지배하는것을 발견했다."그리고그는결론적으로다음과같이 말하고있다: "나는민주당과공화당의 종교로칭하는것보다그것을 더낫게설명할수가없다."  

지난 166년동안많은 것이 변했지만, 아직도상당히많은 것들이 미국에그대로남아있다는것을 보고하러북미대표는오늘여기 욕(York) 지방에있다. 미국에서의 종교적 표현에서 대중적인 인기를누리려는충동은 아직도많이 살아있다. 그리고그것은 지금 거의 모든 주요 대도시 지역에서 교외 풍경의 일부가된 커다란복음주의적 대형 교회들에게있어서 특별히두드러진다. 그런데이러한교회들의 엄청난 영향은 분석과설명을 요구하고있다. 이 글에서 필자의 목적은 이 강의의 구조에반영된 바와 같이 설명, 분석, 비판, 그리고도전의 네가지 이다. 그리고이 글 자체는다른자료에서 시작된 보다긴 논쟁의 축소된 형태이며, 필자가제시한이 글의 제목은 그주제이기도하다. 즉 대형교회의 음악은 해독이면서 또한축복이라는것이다. 여기에서 주된 일은 이러한음악의 어떤 방면이 이상의 각범주에속하는가를분별하는일이다.  

1. 설명

가령우리가대형 교회들을 두 가지의 기준, 즉 그규모와 그교회들이 가진 명백히대중적이고, 복음주의적이며, 심지어기업적인 성향에의하여정의한다고가정해보자. 욕 민스터(York Minster)는크기로말하자면 충분하지만, 대중적이지가않다. 반면에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의 기독학생회는대중적이지만, 크지가않다. 결국이 두 개의 기준은 북미에있는약 400개의, 영향력은 있지만비교적 적은 수의 교회들을 남겨놓게된다.

이러한정의에비추어서 필자는이러한대형교회 내에서의 교인들의 노래가가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설명하려고시도하는여섯 개의 진술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가치판단이 아니라나타난 현상을 진술하려는의도를가지고있는것으로, 음악이나 예배의식 비평가에의해서 보다는참가자-관찰자로서의 문화 인류학자에의해서 제공되는진술과같은 종류의 것이다. 이 진술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당연한듯이 보여지겠지만, 주로북미 대형교회에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그주제를소개하려의도된 것이다.

첫째, 이러한교회들의 음악은 전형적으로두 종류의 분명한형태로표현된다. 즉 연주중심의 기독교현대음악(예를들면, CCM 또는보다대중적인 것으로크리스챤락(Rock) 및 성경또는찬양합창곡이라고불리게된 참여중심의 음악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말해서 이 두 가지 유형은 다음과같은 여섯 개의 공통적인 음악적 특징을 보여주고있다: 즉 정력적이고, 빠른박자에, 단순한화음구조, 중요한반복, 장조의 사용 및 시끄러운 악기의 사용 등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음악은 상업적이고대중적으로인기 있는것과같이 들리도록만들어졌다. 이러한세계에서 미리녹음된 배경테입, 노래인도자 각자에게주어지는마이크, 그리고수천달러의 음향시설은 전통적인 교회에서의 올갠과성가대석 만큼이나 흔한것이다.

둘째로, 이러한음악의 가사는주로두 가지 출처에서 나온다: 첫째는성경으로부터의 찬양송과둘째로는종교적 체험에대한설명이다. 이 두 가지 장르모두에서 가장 중요시되는것들 중의 하나는사용되는언어가지역적이고, 또한그스타일, 말씨, 그리고형태에있어서 구어체라는것이다. 이러한가사들은 직접적인 담화체요, 대화체의 말을 사용하며, 그사용언어는복잡함과미묘한의미를의식적 으로피하려한다. 즉 미묘하고, 깨닫기 어렵거나 상징적인 것을 의도적으로피하고, 명확하고접근가능한것을 선호한다.

셋째로, 이러한교회에서의 음악은 대개의 경우 올갠반주자나 전문가또는비전문가로구성된 성가대에의해서가아니라보통"예배 팀"(worship team)이라고불리는평신도예배 인도자들에의하여인도된다. 이런예배 팀은 락(Rock) 악단과캐톨릭교회의 포크(folk)음악이 곁들인 미사에서의 예배의식 선창자의 절충형이다. 마치 애리조나 주 피닉스 시의 Community Church of Joy에서의 "복음 악단"(Good News Band)과도같이 이 팀들은 "현대음악"을 연주하며 찬양을 인도한다. 또한노래를만드는것이외에도그들은 음악과예배 진행에설명을 제공하면서 하나의 예배의식 관리자로서 일한다.

넷째로, 이 400개의 교회에서의 음악은 언제나 소리증폭기(amplifier)를사용한다. 악기 자체의 음향은 많은 북미 대형교회에서는거리가먼 것이어서, 비싼 여러개의 조정기계가달린음향장치가없이 노래하는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이것은 음악과가사의 형태에영향을 주게된다. 즉 의도적인 화음, 가사의 반복, 그리고음악적 조화를유지하기 위하여강한음률을 요구하게된다.

다섯째, 이러한음악은 큰 규모로이루어진다. 필자가앞에서 제시한네개의 진술은 대형교회뿐 아니라전세계의 폭넓게다양한복음주의 및 오순절 교회, 여름캠프및 대학생 모임 등에도적용된다. 그러나 대형 교회들이 다른점은 그들의 큰 규모에있다. 2000명이나 그이상의 사람들 앞에서 제공되는음악은 15명의 연주자로된 악단과 20-40개의 확성기로넓은 공간에울려퍼지게된다.

여섯째, 비록제한되었지만이런교회에서도전통적인 찬송가의 역할은 꾸준하다. 대부분은 정규적으로소규모의 선정된 찬송가를부르는데, 이것들은 사람들의 문화적 의식 속에깊이 박힌찬송가이다. 이러한찬송가에는몇 개의 잘 알려진 성탄송 외에도"갈보리산 위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면류관가지고," "만입이 내게있으면," "거룩, 거룩, 거룩" 등이 있다. 이 찬송들은 종종 단순한화음의 진행가운데짧아진 가사, 그리고추가된 (드럼등의) 타악기 부분들로"재 포장" 되었지만, 많은 전통적인 찬송가곡집에있는찬송들과동일한곡임을 알아볼 수 있는것들이다.

2. 해석

이러한진술에근거해서 우리는이제 해석으로이동하고자 한다. 이러한표면 아래에는무엇이 진행되고있는가? 어떤 문화적, 역사적, 신학적 역학이 이 움직임이 가진 독특한형태를제공하고있는가?

첫째로, 많은 북미의 대형 교회들은 예배와 음악에대한그들의 접근방법에서 자신의 정체를발견한다. 이러한교회들은 종종 그들이 고백하는신조나 그들이 제공하는프로그램에의하여알려지지 않고, 예배 및 특히그들이 즐기는음악에의하여알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상당한시간과에너지를음악프로그램에투자한다. 그들은 큰 예배당에서 전문 성가대가하듯이 음악에돈을 사용하며, 그들 중 많은 수는그들의 음악프로그램에참여하는데심사를요구하기도한다. 그들의 음악은 고전적이거나 전통적이 아니라전문적이다. "질"과"탁월함"은 (교회음악전문지인) The Hymn에서 그러한것같이 그들의 간행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말들이다.

둘째로, 대형교회나 이 대형 교회들이 나타내는대중을 향한움직임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대형 교회들과그들의 음악은 토퀘벨(Tocqueville)이 "민주당적인 종교" 라고묘사한것의 현대적 유형이다. 그러므로북미 문화의 현저한특징들을 염두에둔다면, 대형교회와 그들 음악의 출현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북미의 예배역사 전체에공통적이었듯이, 이러한형태의 예배의식과찬송의 표현을 추진하고있는것은 엘리트나 지식인의 문화가아니라대중문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이런이유로인하여지난 10년동안많은 예배에대한연구는보다큰 사회 문화적 패턴이나 소비주의, MTV, 개인주의 등의 견지에서 분석을 시도해왔던것이다.

셋째로, 북미 대형교회에서의 음악은 예배의식의 구조를보완하도록선정되었다. 대부분의 대형 교회들은 기독교예배의식의 전통적인 형태를무시하거나 배척해왔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교회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예배를위한의식적인 패턴이나 순서를나타내고있다. 그런데이러한대형교회에서의 전형적인 예배의식의 구조는예배의 시간과가르침의 시간사이의 분명한분리를보여주고있다. 음악은 전형적으로전반기에두드러진데, 이 전반부에는교인들을 신나는찬양으로부터생각하는예배로인도하기 위한움직임의 연속을 보여주고있다.

그리고이러한연속은 예배 드리는자의 움직임을 "성전 뜰"(outer court)로부터하나님이 임재 하시는"지성소"로의 움직임으로설명하는대중적인 신학서적의 증가로인하여지지 되고있다. 이러한패턴에서 음악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방편이며, 따라서 음악은 성례와도같은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사용된 단어들은 중세의 성찬의 신학이 그렇듯이 종종 단호하고몹시 의미가함축된 상태이다. 즉 불려진 찬양이 예배자들을 하나님의 임재로안내한다는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이러한입장을 "그렇게하기만하면 이루어진다" - ex opere operato ? 라는말로표현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여러저술들은 전반적으로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의 구체적인 체험을 원하고있음을 나타내고있다. 이 논의에서의 중심적인 단어들은 "친밀함," "순수성," "관계성," 및 "따스함" 등이다. 즉 음악은 (폴틸리히에게있어서의 고상한예술 작품에대한중재의 개념과같이) 하나님의 임재에대한느낌을 중재하기 위하여작용하며, 이것은 예술적인 세련됨이나 깊이 뿌리박힌상징적인 표현의 계층들을 통해서가아니라오히려하나님을 향한직접적인 말을 통해서이며, 이러한말에서 음악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해석되는것을 느낄 수 있는체험을 불러일으키는기능을 하게된다는것이다. 그런데이러한신학적 견해는음악표현의 형태를결정하게되었다. 즉 이러한교회 어디서나 발견되는접속곡(medley) 은 합리적이고교훈적인 언어의 사용을 넘어서 오랜기도, 묵상 및 "하나님임재의 체험"으로이동하도록의도된 것이다.

넷째로, 북미 대형 교회들은 이러한예술적 표현의 형태를지지하는크고독립적인 산업체를만들어냈다. 이 산업체들은 그내용이 출판되거나 녹음된 음악, 판권면허과정, 잡지 및 강습회 등으로가득 차있다. 이것은 기독교라디오 방송국의 넓은 방송망에의해지지되고있으며, 일련의 모델과주인공, 즉 목회자, 음악가및 사업상담자(consultant)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산업은 미국과캐나다의 찬송가협회의 서적 사업으로대표되는기존 교단의 찬송가산업만큼이나 많은 교회의 예배에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런데이 산업은 모든 산업과마찬가지로시장 지향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어떤 것이 잘 팔리는가에관심을 가지고있으며, 거기에맞추어반응하고자 한다.

다섯째, 이 400여개의 교회들은 많은 북미 교회의 모든 방면에있어서 지대한영향을 미쳐왔다. 그교회들은 주요 뉴스 매개체의 관심을 유발했고, 이미 여러개의 학술논문과박사학위 논문의 주제가되었다. 그들은 거의 모든 교단에속한교회들에게영향을 미쳤으며, 자신들의 철학을 유럽, 아시아및 태평양주변에수출함에따라서 그들의 영향은 북미를넘어서 확대되고있다. 그들의 영향은 특별히예배와 음악에있어서 중요하며, 대형 교회들은 개신교도들을 위한예배의식의 실험실과도같다. 영국의 대성당들이 교구교회에서 주로사용되는찬송과성가를만들어내는실험실이었던것과마찬가지로, 미국의 대형교회는수천개의 다른교회들에게영향을 끼친 음악의 형태, 스타일, 그리고유형을 만들어내는실험실이 되어왔다.

그런데이러한영향은 많은 북미의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노래를접근하는가장 근본적인 전제 및 기본적으로활용되는어휘들을 바꾸어버렸다. 즉 많은 북미 기독교인들은 예배에서의 음악이 올갠이 아니라기타가인도하는찬양밴드에의하여적절하게이루어지며, 예배음악의 기본유형은 찬송가가아니라합창과유행가풍의 곡조를가진 노래라는전제를그대로받아들이고있다. 실제로이와 같은 기독교인들에게있어서, 그리고그가운데의 수백 명의 음악인도자와 예배 인도자들에게찬송가협회라는생각은 기이하게조차보이는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오늘날 북미 대형교회에서 두드러진 음악은 역사적, 신학적, 사회학적, 그리고문화적인 세력들 간의 복잡한연결의 산물이다. 그것은 욕 민스터(York Minster) 지역의 중세 신비연극, 제네바 성시집, 또는감리교의 초기 찬송가만큼이나 연구하기가복잡한현상이다.

3. 비판

이러한복잡성에비추어볼 때 (필요한것이라할지라도) 어떠한비판도위험을 안고있는실정이다. 찬송 연구가나 찬송 작곡가들간에는이러한교회와 그들의 음악을 2류급 정도로생각하는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형태의 비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북미에서 The Hymn이라는간행물의 내용들은 미적으로결함이 있어보이는장르들을 반대하기 위한신랄한비판들을 게재해왔다. 1950년대에는빅토리아조의 찬송에대한토론을, 그리고 1960년대에는복음 찬송에대한토론을 게재했다. 1970년과 80년대에는토론이 민속음악과찬양합창곡에집중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가오늘날 주장하는접근방법이 아니다. 이러한접근방법이 안고있는문제는그리스도의 몸 중 거대하고자라나는부분과의 대화를단절시키며, 때로는우리가학문의 세계에서 추구하는객관성을 단념한다는데있다. 필자는우리가이 움직임을 비판해야한다고주장하고자 하지만, 그비판은 이러한운동의 지지자들을 존중하는방식으로이루어져야한다고생각한다. 우리의 도전은 무분별하거나 비관용적이 되는것이 아니며, 탐미주의자나 교양이 없는사람이 되는것도아니다. 필자의 관심사는이러한대형교회를변호하거나 배척하는것이 아니라, 다양한범 교단적 공개토론회가감리교, 로마캐톨릭및 루터교사람들로하여금 성찬의 신학과실천에있어서의 차이점들 조사하도록한것과상당히같은 방법으로그들의 음악가들과목회자 및 컨설턴트들과의미 있는대화를이루는방법을 발견하려는것이다. 따라서 필자는이제 "찬송가의 미학"이라고불릴수 있는것에근거하여이 운동에대한비판과함께 진행하기를제안한다.

가. 찬송가의 미학을 향하여

현재의 이 모임은 미적 취향에관한질문에초점을 두고있다. 미적인 질은 오랜동안우리기관의 관심사가되어왔다. 우리는종종 "보다높은 음악의 질"을 나타내는"보다나은 찬송가"를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종종 그것이 구체적으로무엇을 의미하는지를밝히지 않는다. 그리고우리는다른예술적 표현들(예를들면, 연주회 음악)을 위하여만들어진 미적 이론과감각을 수입하거나 수정하여교회 노래에적용하는경향이 있다.

이것은 어떤 한도에서는우리를돕는다. 가령이것은 우리로하여금 찬송이 어떤 기본적이고기술적인 음악적 및 가사의 기준에맞아야한다는것, 즉 음악이 어떤 긴장과해결의 감각을 가지고, 가사들이 뒤섞인 비유를제시하지 말아야한다라는기준에맞아야함을 말할수 있도록한다. 문제는이러한기준들이 언제나 절대적으로필요하기는하지만불충분하며, 또한찬송의 유형에무엇이 독특한지 설명하지를못한다는점이다. 따라서 어떤 추가적인 기준들이 필요하게된다.

이것을 위하여필자는"예배의식의 미학"이라고불릴수 있는작은 분야에서 최근에있었던대화들을 소개하고자 한다최근신학적 및 철학적 미학과의 대화를제공하는홍수같이 밀려나오는책들은 "기독교예배라는상황에서 무엇이 좋은 예술을 만드는가?" 라는질문에대한답을 시도하고있는데, 이 질문에대한답들은 거의 언제나 다음의 세 가지를제시하고있다:

첫째, 찬송가를포함한예배의식에서의 예술은 기능적이다. 그것의 목적, 즉 존재이유는모인 교회의 목적을 이루는것이다. 기독교예배의 주된 요점이 모인 공동체와 그것의 창조주 사이의 일련의 개인적 및 관계적인 행동(즉, 죄의 고백, 하나님을 찬양, 하나님의 간섭을 위한중보 기도)에참여하는것이라면, 좋은 찬송가는이러한행동들이 성취되는것을 가능하게만든다. 이 주제의 변형들은 바가기니(Cyprian Vagaggini), 리유(Gerardus Vander Leeuw), 폴리(John Foley), 월터스토프(Nicholas Worterstorff) 등을 포함한다양한이론가들에의하여발전되었다. 이것은 예술 자체를위한예술을 주장하는순수주의자의 미적 이론들에대한의식적인 부정을 뜻한다.

둘째, 찬송가를포함한예배의식에서의 예술은 지역적인 것이다. 찬송가들은 음악적, 시적, 또는미적 훈련이 없는사람들에의해서 쉽게받아들여질 수 있는음악형태여야가장 좋은 것이다. 찬송가의 경우, 지역적인 것은 내적인 덕이지, 악이 아니다. 가장 큰 대형교회의 음악에별로감동하지 않을 루틀리(Erik Routley)는그럼에도불구하고찬송가를"음악교육이 없는사람들이 함께 노래를부르며... 문학교육이 없는사람들이 함께 말할수 있는그런시이다" 라고말했다템펄리(Nicholas Temperly)는자신의 광범위한영국교구교회의 음악연구를다음과같은 말로결론을 내리고있다: "찬송은 듣는자나 더욱이 비평가가아니라노래부르는자를위하여존재한다... 만일 찬송가곡조가음악전문가에게기쁨을 준다면, 이것은 단지 우연한유익임에틀림이 없다." 이러한정의에의하면 찬송가들은 지역적이며, 지역문화와 심히결부된 표현의 형태이다.

이것은 즉각적으로예배의식의 토착화에관한최근의 저술을 생각나게한다. 20세기 기독교예배에대한바티칸 II의 많은 공헌중에하나는예배의식의 표현이 지역교인들의 특정한문화적 환경을 반영한다는주장이다. 바티칸 II 이후로적은 수의 예배의식 연구자들은 어떻게 (토착화, 고유화, 문화수용 등 다양한용어로표현된) 이러한적응이 가장 잘 일어날 수 있는가에관하여의식적인 시도를해왔으며, 문화적 개별성에대한포스트모던의 관심사에힘입어서 다양한전통의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계획에열정적으로접근해왔다. 로마카톨릭교회는자이레(Zaire)를위하여말이 많았던"고유 의식"을 만들어냈고, 개신교도들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및 동남아시아에서의 고유한음악적 자료의 개발을 열심히장려해왔던것이다.

그런데중요한것은 토착화를향한최근의 움직임이 고유한표현 양식을 추진하기도하고제한하기 했다는사실이다. 이러한토착화의 움직임은 기독교예배의 역사적 구조를보조하는한도내에서만고유한형태를발전시키도록장려해왔다. 일반적으로말해서, 이 운동은 기독교예배가그문화적 환경으로부터자연스럽게발생되어야한다고주장하지만, 또한기독교신앙의 중심적인 가르침에반하는문화의 방면들을 비판하고있다. 그것은 예배가"문화적인 굴복"이나 "문화적인 무관함"모두를피해야할것을 주장한다.

셋째로, 찬송가를포함한예배의식에서의 예술은 공동의 것이다. 이런점에서 예배의식에서의 예술은 서방 문화에서의 많은 고급 예술의 장르및 교육 기관과다르다. 연주회 음악에서 우리는연주하는예술가각자의 뛰어남을 가치 있게여긴다. 그러나 예배의식의 문맥에서 뛰어남이란재 정의된다. 즉 여기에서 가장 높은 가치는일단의 음악비숙련자들로하여금 함께 음악을 만들 수 있게하는것이다. 월터스토프 (Nicholas Wolterstorff)가주장한대로,

"예배의식에서의 예술이란나머지 우리는그곁에서서 그것을 즐기는사람이나 비평가가되고예술가만'자기 자신의 것을 하는일'이 아니다. 예배의식에서의 예술은 예술가가예배의식에참여한공동체에게그공동체의 찬양과죄의 고백 및 중보 기도를위하여제공하는것이다. 예배의식에서의 예술은 우리를위한예술이요, 우리로하여금 전 세계적인 사회를가능하게만드는예술이다. 예배의식의 예술에서 예배 공동체는솜씨있는제사장적인 손과목소리를발견하게된다."

그러므로예배의식의 예술에서는자율적이고혼자만인 예술적 천재에게교만의 여지가제공되지 않는다. 대신에예배의식에참여한예술가는종으로서의 역할을 취하도록부름을 받으며, 예배를드리는자들로하여금 자신들이 가지고있음을 알지 못했던목소리를주어하나님께 찬양의 노래와 기도를드리도록한다.

2. 찬송가의 미학과북미 대형교회의 음악

이제 다시 대형 교회들로돌아가자. 이러한교회들과그들의 음악은 과연이 세 가지 기준에비추어어떻게나타나고있는가? 그결과는복합적이다.

첫째, 이 음악은 기독교공동체예배의 행위들을 지지하는기능을 하는가? 어떤 경우에는그렇지 않은 것이 명백하다. 어떤 경우에는노래들과찬송가들이 그들의 즉각적인 호소력때문에불려지고선택된다. 이 노래들은 막연히종교적 감상이나 신학적 주제를나타낼 지 모르지만, 그들이 의도한효과는사람들로하여금 "그노래를통하여나는나의 죄를하나님께 고백했다"거나 "그노래를통하여나는역사가운데의 하나님의 능력있는일하심을 찬양을 드리는방편으로되새겼다"등의 말보다는"나는그음악을 즐겼다"거나 "그것은 적절한것이었다"라고말하게하는것이었다. 어떤 교구음악인들이 단순히음악적으로인상적이거나 성가대로하여금 그들이 가진 시설과공연행위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게한다는이유로인해서 찬송을 선택하듯이, 대형교회의 어떤 음악인들도예배의 목적과는상관이 없는이유들에의하여음악을 택한다.

또 다른경우에대형교회에서의 음악은 예배의식 행위를보충하는역할을 한다. 노래와 찬송가들은 구원역사에서의 하나님의 일을 찬양하며, 죄를고백하며, 중보기도를할수 있게예배 드리는자들을 인도하기 위하여선정된다. 예를들면, 필자는중보기도시간에"In Our Lives, Lord, Be Glorified"와 같은 단순한노래를기도서에서의 반복 어귀같이 (가령"주여, 당신의 긍휼가운데우리의 기도를들으소서"와 같이) 반복해서 부르는것을 자주 목격했다. 이런경우, 음악과음악이 연주되는방법에대한모든 것(가사, 음악가의 자세, 노래의 소개)은 그음악이 특정한예배의식의 행위를가능하도록하는방편을 보여주고있다. 이러한노래의 곡조와 가사에대하여우리가무엇이라고말하든, 이러한예는이 첫째의 기준에잘 맞는다. 요약하자면, 이 첫번째 기준은 대형교회에서의 음악을 그모두는아니지만어느정도인정하고있다.

둘째, 이러한음악은 지역적인가? 여기서는"그렇다"라는말외에다른말로답변하기가매우 어렵다. 대형교회에있는많은 음악가들에게두드러진 목표는그감각이 주로대중적이고상업적인 음악형태에젖어있는사람들에게맞는곡조와 가사로된 음악을 제공하는것이다. 바로이런점에서 대형 교회들은 우리와 산업화된 서방의 모든 교회들에게가장 큰 도전을 주고있다. 이러한도전은 필자가위에서 언급한최근의 토착화의 시도로부터배운 교훈을 고려할때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최근의 토착화의 작업은 우리에게이러한과정이 전 세계적이며 필연적임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북미의 대형교회는이 사실을 확인시켜준 또 하나의 예이다. 4세기의 대성당이 콘스탄틴황제의 지배를반영했듯이, 자이레의 로마카톨릭교회에서의 교인들의 댄스가문화의 정신을 반영했듯이, 북미 대형교회는대중 음악, 텔레비전, 그리고깊이 자리잡고있는대중을 추구하는성향에의하여만들어진 문화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중요한것은 최근일어나고있는 (산업화된 서방사회 "내부에서의") 적극적인 토착화 경향에괄목할만한하나의 예외가있다는사실이다. 그것은 흥미롭게도외국에서 그렇게도철저한토착화를추구하던사람들 중의 얼마는본토에서 진행되는그가장 적극적인 형태를안타까워한다는것이다. 그러나 대형교회를회피하거나 무시해버리는것은 진행되고있는토착화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 중 하나를피하는것이다.

반면에최근의 토착화 작업은 그과정이 한계를가지고있음을 가르쳐주었다. 토착화는기독교복음이나 예배의 패턴으로부터핵심적인 요소들을 잘라내는구실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이것이 바로대형교회에서 일어나고있는일이며, 특별히공동체로서의 죄의 고백, 애통, 빈번한성찬의 집행및 공동체로서의 세례의 실행을 없애버린교회들에서 그렇다. 또한토착화는찬송가의 정서적인 폭을 제한하는구실이 아니다. 지역적인 문화 경험은 음악을 통하여믿음의 표현을 강화하고깊게하는자료가되어야하지, 그것을 제한하는것이 되어서는안된다. 어떤 경우 대형 교회들은 이 점에있어서 잘하고있지를못하며, 특별히그들의 음악이 균일화 될 때, 즉 위에서 필자가언급한특성(빠른리듬, 장조 등)이 대부분이 아니라그들의 음악거의 모두에나타날 때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이 기준은 북미 대형교회의 접근방법에대한인정 및 비판하는일을 돕는다. 토착화된 음악은 대중문화로부터의 소리와 표현 형태를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기독교신앙의 완전한능력, 의미 및 정서를표현하기 위하여의식적으로문화적 환경을 넘어서기를추구해야한다.

셋째, 이 음악은 공동의 것인가? 그중 얼마는그렇다. 어떤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열도록돕는방법"과같은 글을 쓰기도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두 가지의 요인이 이를반대하고있다. 첫째로, 많은 대형교회의 음악인들은 주로가수를모델로삼는다. 어떤 교회에서는클래식 음악가수를그본으로삼고있는반면에, 어떤 교회에서는대중적인 가수를그본으로추구하고자 하는유혹을 받고있다. 문제는이 두 가지 형태의 모델모두가가수, 그리고종종 특출한능력을 가지고혼자서 하는가수를모델로삼는데있다. 그결과로이러한음악의 상당한부분이 특정대상을 위한것이 되며, 일반 사람들은 참석할여지가없게된다. 그리고종종 사람들에게보이는것을 돕는무대장치와 음향을 가지고오히려그정 반대의 것, 즉 사람들이 참석하는행사가되지 못하는것을 시도하게되는것이다.

또 다른요인은 대형교회의 큰 규모가이러한음악에참여하는방법에극적으로영향을 끼친다는것이다. 사회 심리학자들은 커다란공간과많은 사람의 모임은 다음의 두 가지 효과중 하나를나타내게된다고말한다. 즉 웰쉬(Welsh) 지방의 대규모 찬송 집회와 같이 이러한환경은 대중으로하여금 열렬하게노래하기를장려하거나, 아니면 많은 운동경기 전에하는애국가를부르는것과같이 사람들로하여금 적극적으로음악에참여하는것을 기피하게할수 있다. 그런데이유는어쨌든지 간에보통미국의 대형교회에서 예배를드리는것은 종종 웰쉬(Welsh) 집회보다는운동시합에서 부르는것과같다. 이 경우 큰 규모는자신을 드러내지 않는참여부족을 가능하게만든다. 이것이 음악그자체에속한성질은 아니지만, 흔히일어나는현상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만일 우리가원리상으로대중문화의 형태를반대한다면, 북미 대형교회의 음악은 무시되거나 없어져야한다. 그리고오늘여기에있는사람중 많은 수가이러한견해를가진 부류에들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이런교회들과관련을 맺기 원한다면, 이러한기준들은 이러한교회에서 어떤 음악이 축복이며, 어떤 것이 해독인지 구별하도록우리를도울 것이다. 또한이 기준들은 찬양, 죄의 고백, 선포, 도고등의 예배의식의 행위들을 보충하고가능하게하는환경이 접근가능토록될 것을 장려하고있으며, 또한전 교인에의한능동적인 찬양을 방해하는공연식 행위들을 비판하고있다. 그리고이 기준들은 기독교신앙의 정서적인 범위와 의미를포함하는새로운 가사와 곡조를만들어낼 것을 권장한다.

4. 미래의 방향

필자는이제 교회에서의 노래의 미래와 찬송가연구의 미래에관한몇 개의 짧은 도전으로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우리가학자나 찬송작가, 또는목회자나 예배연구자, 또는교구음악가든 간에, 우리가이번 주에논의한문제들, 즉 취향, 질, 탁월성, 신학적 및 미적 가치 등은 21세기에들어가는우리에게중요한문제들이다. 이것들은 대중문화의 광범위하고커지는영향을 고려할때 특별히중요하다.

첫째는우리모두에대한도전이다. 이 주제는우리로하여금 찬송가의 미적인 질에관하여좀 더명확하고, 좀 더정확하고, 좀 더교감이 되는설명을 발전시킬 것을 도전하고있다. 찬송이 "취향에맞는"것이어야한다거나 "탁월함을 유지해야"한다는상투적 표현을 반복하는이론적 접근은 대형 교회나 다른대중 지향적인 종교적 표현 양식과의 대화에서 기능을 잘 발휘할수 있는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해독이 무엇이든지 간에, 북미의 대형교회와 관련된 하나의 축복은 모든 교회가그리스도의 복음과가장 완전하고심오하게일치하는예배의식 행위의 종류와 교인들이 부르는노래의 패턴을 명확하게만들지 않으면 안되게되었다는점이다.

둘째로, 역사가, 신학자, 사회과학자, 찬송 연구자들을 포함한학자들에대한도전은 만일 다음 세기가소위 "고전적인" 형태의 찬송가를사용하는사람들과보다"대중적인"형태의 노래를사용하는사람들간의 대화를갖도록한다면, 우리에게는이 대화를지원하기 위한보다학문적인 연구가절실하게필요한실정이다. 상당한분량의 학문적 노력들이 찬송가의 지적, 신학적 및 음악적 방면들을 살펴왔다. 종종 찬송은 한편으로는연주회 음악을 위해서, 또 다른한편으로는신학적 논술을 위해서 발전된 방법에의하여연구되어왔다. 그러나 우리에게사회적 또는문화적 역사의 수준에서의 작업이 더욱 필요하다. 가령개인적인 일기가중요한음악편집에가치 있는근거로여겨지는작업이 필요하다. 찬송가들이 음악가, 신학자, 또는목회자로서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그기능을 발휘해왔는가? 전에있던음악가들은 어떤 방법으로미적인 탁월함과접근가능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했는가? 하고말이다.

셋째로는, 이러한북미 대형교회가찬송작가, 시인, 편집자, 발행인들로하여금 시적, 신학적 및 음악적 기준에맞을 뿐 아니라지역적이고대중적인 표현형태를받아들이려는노력을 존중하는음악을 작곡하고발행하도록노력을 배가할것을 도전한다는점이다. 질적으로뛰어난 음악은 숙달된 성가대와 클래식 음악에훈련된 음악가들만이 아니라북미 대형 교회들의 찬양팀을 위해서도필수적이다. 북미 대형교회 에서 어떤 노래가실제로불려져야하겠는가?

출판되지 않은 논문 계획에서 Worship Leader 잡지의 편집자이며 대중추종 형태의 찬송의 지칠 줄 모르는지지자인 프롬(Chuck Fromm)은 "오늘날 개발되고있는새 노래(New Song)는성경의 위대한주제들을 회복해서 시적 및 심오한서정시로표현하는사람들의 영향을 기다리고있다"고말한다. 이것은 우리협회의 회원들이 어느정도경험한일이다. 노래의 구성 과정은 언제나 주어진 작업의 제한을 확인하는데서 시작한다. 우리는북미 대형교회의 찬양팀을 위한음악을 만드는일을 우리의 음악제작상의 제한으로받아들이지 않으려는가? 모든 미적인 가사 및 음악상의 기준에맞으면서도널리퍼지고, 계속되고, 영향력있는북미 대형교회의 상황을 존중하는음악을 만들 창의력이 우리에게는있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해독이며 또 다른사람들에게는축복인 북미 대형교회의 교인들의 노래는이제 우리의 찬송가협회에강력한도전을 제시하고있다. 토퀘빌(Tocqueville)은 북미 기독교에대한그의 분석을 다음과같은 충고로끝을 맺고있다: "그것을 반대하지 않는모든 민주적인 본능을 존중하고, 많은 호의적인 것들을 이용함으로써기독교는가장 위험한적인 개별적 독립의 정신과의 투쟁에서 성공적 으로이기고있다." 이러한분별하는참여에로의 부름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유효하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힘든 업무를위하여우리에게은혜와 지혜를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