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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예배 신학에서 사용된 이미지와 주제
칼빈이 예배에 남긴 유산의 한 특징

필자에게 주어진 주제에 대한 필자의 첫 번째 반응은 당황함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예배에 관하여 칼빈 남긴 유산이란 말인가? 맥키(Elsie Anne McKee)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의 자신의 취임 연설에서 "칼빈과 예배는 서로 조화되지 않는 주제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예정된 사람들의 강점이 무엇이든, 예배에 관한 한 그들은 가망이 없는 실패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라고 빈정대지 않았는가? 그러나 필자는 또한 노틀댐(Notre Dame) 대학원생으로서의 첫 날에 신학과에서 더피(Regis Duffy) 신부로부터 "또 하나의 칼빈주의자가 있게 된 건 분명 좋은 일이다" 라고 환영의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더피 신부는 칼빈 전문가였으며, 우리가 (기독교강요의) 네 번째 책의 칼빈주의자 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었다. 성찬 신학에 대한 세미나에서 그는 어거스틴과 래너(Karl Rahner)에 관한 강의를 했지만, 그의 과목들은 기독교강요의 네 번째 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성례의 예배를 마술적이 아니라 신비적이라고 생각한 칼빈의 비전에 이끌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이 글에서 필자가 살피고자 하는 예배 분야에 남긴 칼빈의 유산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칼빈이 예배에 관하여 남긴 유산은 측정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그것은 예배 그 자체만큼이나 복잡하다. 그의 특정한 의식들 각자가 가진 영향(특별히 쟌 낙스와 스카틀랜드에 끼친 영향), 설교에 대한 그의 접근방법, 우상파괴에 대한 그의 특별한 접근, 그리고 적어도 설교, 기도, 세례, 성찬, 결혼, 장례 행위 및 음악 등 공중 예배의식의 각종 요소에 대한 그의 선호 등을 살피려면 자세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가 남긴 유산에서 가장 오래 남아있는 면 중의 하나는 제네바에서의 자기 나라 말로 된 찬송가의 장려일 것이 틀림없다(그러나 필자는 이 주제에 관하여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한 바 있다 ). 또 다른 복잡한 문제는 그가 남긴 유산 중 어떤 것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성례의 실천에 관하여 쯔윙글리는(또는 적어도 쯔윙글리의 견해들은) 대부분의 개혁 교회들이 실행하는 것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미 예배의식 연구원(North American Academy of Liturgy)

이 글에서 필자는 칼빈의 예배의식이 남긴 유산의 하나로서 더피 신부에게 매력적이었던 생각, 즉 칼빈의 예배신학 또는 보다 좁게 그의 예배의식의 신학(즉, "정해진 교회의 모임"안에서 무엇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그의 생각)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필자는 칼빈의 예배의식의 신학에서 얼마의 기본적인 주제들과 이미지를 살피고자 한다. 지면 관계상 그것을 여기에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겠지만, 많은 개별적인 항목에 대한 익숙함에 근거해서 전체적인 윤곽, 즉 칼빈이 가졌던 예배의식의 신학에 관한 개념적인 윤곽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러고 나서, 필자는 (둘째로) 미래의 학문적 논의와 오늘날의 교회 생활에 중요한 관심사가 될 몇 가지 역사적 및 신학적 질문을 제시하기 바라면서 결론적인 언급을 하고자 한다.

처음부터 필자는 두 개의 방법론적 명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 첫째는 이 주제에 대한 어떠한 연구도 이 주제에 대한 칼빈의 글 전체, 즉 기독교강요와 예배에 관한 언급 뿐 아니라 주석, 설교, 서신 및 다른 여러 종류의 교회 문서까지를 포함해서 고려할 때만이 성공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글은 칼빈이 가졌던 예배의식의 연구들이 기독교강요를 지나치게 강조해온 사실에 대한 교정책으로 그의 주석에 많은 강조를 두고 있다. 둘째로, 필자는 예배 그 자체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살피는 것보다는 예배를 드리는 자의 경험에 대한 그의 이해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그 자신과 같은 중세의 선구자들과 함께 예배 요소,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성찬 요소의 신학적 지위에 관하여 글을 썼지만, 또한 그는 예배를 드리는 자의 예배 경험의 방면에 대한 글을 남겼다. 아래의 설명에서 필자가 강조하려는 것이 바로 이 주제이다.

1. 예배 의식에서의 네 가지 죄

필자는 "예배의식에서의 죄에 관한 칼빈의 신학"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을 할당한 부분과 함께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예배에 대한 칼빈의 글, 특별히 그의 주석들은 필자가 아래에서 네 가지 주요 "예배 의식에서의 죄"라고 부르는 것으로 거듭해서 되돌아가고 있다.

그 첫 번째 죄는 불순종이다. 칼빈이 가졌던 일차적인 예배의식의 기준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때, 그가 지적한 첫 번째의 잘못이 예배에 관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타락한 예배 의식은 누구나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어떤 새로운 것을 고안해 낼 때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스라엘의 예배에 대한 선지자들의 많은 비판을 예배를 위한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의 파괴에 대한 금지명령으로서 이해했다. 가령 스바냐 1:5에 대한 그의 주석은 이러한 이해의 전형적인 것이다:

"선지자가 정죄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이 간단하고 명확하게 명령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 다양하고 이상한 예배의 형태를 고안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 이와 같은 자유를 갖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떤 면으로나 그의 순전한 말씀으로부터 떠나게 될 때, 모든 종류의 예배를 그에게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신다. 우리는 순종이 모든 제사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선적인 원리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칼빈이 주석하고 있는 이 본문이 불순종의 문제를 명확하게 거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이 본문을 주석하기 위하여 불순종의 문제를 도입한 것은 칼빈의 사상에 있어서 이 불순종의 문제가 얼마나 "근본적인 죄"로 작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죄는 위선이다. 요엘 1장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이 죄를 다음과 같이 짧게 설명하고 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지 않았다. 외부적인 의식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부패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선지자가 그들에게 권면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기 전까지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으로부터 질책을 받을 것이 확실했다."

이 거짓된 예배가 첫 번의 시험,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관한 것은 통과했으나 두 번째의 시험, 즉 마음에 대한 시험에는 실패한 것을 주목하라.

따라서 칼빈의 강조는 내적 예배, 즉 마음의 예배에 있다. 이것이 없는 외적인 예배의식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미가 6장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위선자들은 모든 거룩함을 외적 의식에 둔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우 다른 것을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그의 예배가 영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인은 "그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최소한의 의도도 없이 외적인 희생물을 통하여 빚을 갚아버리듯이 하나님을 달래려고 했던" 위선자의 전형이다. 아마 이 주제에 대한 고전적인 진술은 이사야 1:11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종교 전체가 이 점에 달린 것처럼 의식에 관한 지시를 가장 철저하게 조심하며 바라본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지시를 오랜 동안 조심스럽게 지키느라 지치게 될 때, 자신들이 가장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에) 더욱 경건하게 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의 것들을 보태고 매일 새로운 것들을 고안해내는데, 가장 악한 것은 그들이 진정한 목표를 안중에 두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율례를 남용한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여기에서 칼빈은 예배의 행위보다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 관심을 두고 있다.

세 번째의 죄는 미신이다. 미신이란 예배의 외적 행위와 하나님의 영적 실체와의 적절한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이사야 66:1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미신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으므로, 유대인들은 도움으로 의도된 것들을 장애물로 바꾸었으며, 믿음으로 하늘에 올라야 할 때에 하나님을 그들 자신에게 묶어 놓았다고 믿었으며, 조심 없이 그를 섬겼거나 그들 자신들의 기쁨이 되도록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가볍게 다뤘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칼빈은 불순종과 위선을 피하더라도 미신의 죄에 빠질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성경에 따라서 의식을 행하고 또 순전한 마음으로 그것을 하더라도, 이러한 의식과 상징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순전한 마음만이 아니라 바른 이해, 즉 하나님의 영적 성질에 대한 바른 지식이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창세기 33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신적인 사람들은 미련하고 악하게 하나님을 상징물에 연결하는 것, 즉 하나님을 하늘 보좌에서 끌어내려 그들 자신의 천박한 고안물에 종속 시키려는 반면에, 신실한 사람들은 경건하고 의롭게 이 땅의 표식을 기반으로 하여 하늘로 오른다." 그리고 여기 이사야 1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미신은 사람들이 합법적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예배를 모방하면서도 그들의 모든 의도는 외적인 형태에만 두며, 그들의 진정한 대상이나 진리에 유념하지 않을 때 가지는 마음의 성향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미신이란 불신자들이 하듯이 나무 등으로 만든 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또는 정신의 죄라는 점이다. 그것은 생각의 대상에 관하여 잘못된 관심, 즉 신체적 행동이 갖는 영적 중요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함이다. 좀 비꼬아서 말하자면 우리는 이것을 "예배의식에서의 집중 결핍증"(Liturgical Attention Deficit Disorder)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죄는 우상숭배이다. 다른 종교개혁가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우상을 배척하는 사람이었다. 칼빈은 그 자신이 "보다 더 혐오스러운 우상숭배"라고 부른 것을 개탄했는데, 이것은 "우상이 공개적으로 섬겨질 때"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이 범주에 그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예배와 다름이 없다고 본 (로마 카톨릭의) 미사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는 또한 좀 더 교활한 형태로 나타난 우상숭배에 관해서도 같은 관심사를 보였다: "비록 숨겨져 있지만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 즉 이름의 위장 아래 사람들이 대담하게도 그들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섞어 다양한 양식의 예배를 만들어 내는 경우,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다. "칼빈의 관심사는 "지적인 우상숭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으로서, 이것은 마음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을 섞는 일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개념은 그의 기독교강요의 구조와 그의 중요한 저술에서의 커다란 중심적인 개념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라기 1:11에 대한 칼빈 자신의 표현을 보기로 하자: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대로가 아니고는 하나님이 올바로 예배 드려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한다." 따라서 칼빈의 성경 주석으로부터의 전형적인 구절은 "그(바울)는 하나님이 어떻게 경배 되어야 하는가를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한 고전적인 기독교강요의 구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하나님을 찾는 데 있어서 불쌍한 인간들은 그들 이상으로 올라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를 않고 하나님을 그들 자신의 육신적인 어리석음의 잣대로 측정한다면서 바른 방법을 무시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호기심에서 공허한 추측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제시하는 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추측에서 생각해낸 대로 그를 상상한다. 이러한 차이가 드러나게 될 때, 그들은 어느 방향으로 발을 옮기든 파멸로 직행할 수밖에 없다. 실로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위하여 어떠한 시도를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허구와 꿈을 경배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대부분의 우상, 즉 대부분의 새겨진 형상들은 망치나 정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인 기관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칼빈은 예배에 있어서의 네 개의 구체적인 오류, 즉 불순종, 위선, 미신, 그리고 우상숭배를 지적하고 있다. 이들 서로가 연결된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지만, 이 각자는 또한 서로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용어들을 기술적으로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 즉, 불순종은 예배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요, 위선은 외적인 예배와 내적인 예배의 분리요, 미신은 외적인 의식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이 되는가에 대한 혼동이요, 그리고 우상숭배는 예배의 대상에 대한 잘못된 집착이다. 눈에 대한 에스키모의 자세한 용어와도 같이 칼빈의 자세한 어휘는 잘못된 예배가 가진 넓은 범위에 대한 자세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의 방법에 사용된 어휘는 칼빈이 다른 곳에서 제공하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주석에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바르고 참된 예배의 범위를 나타내는 한계로서 마치 놀이터를 둘러싸고 있는 담과 같은 작용을 하고 있다.

2. 칼빈의 예배의식의 신학에서의 비유와 이미지

이제 우리는 칼빈이 "측정할 수 없는 교회 모임의 특권"이라고 불렀던 것을 묘사하는 이미지, 비유, 비전, 그림 및 예화의 놀이터로 이동하고자 한다.

스캇틀랜드의 발트주의 신학자 토렌스(Thomas Torrance)는 그의 생애 일찍이 칼빈은 "하나님과 관련된 회화적인 사고"를 배척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 칼빈이 시청각 예술의 적이었다는 평판이 있기도 하지만, 사실 그의 글은 그가 비유 또는 유사라고 부르던 폭 넓고 주의를 끄는 시청각적인 이미지의 사용이 특징적이었던 것이다. 칼빈은 (최근 칼빈의 수사학에 대한 몇 개의 연구가 상기시켜 주듯이) 이러한 시청각적 수사법에 대하여 민감했으며, 이런 수사학적 문체의 미덕을 극찬했다. 성찬에 대한 글에서 그는 "비유는 단순하고 정확한 언어보다 어떤 일을 더 바르게 설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진 적절함에 의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 광채로 인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생생한 유사함에 의해서 언급된 내용이 효과적으로 마음에 침투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언어의 눈이라고 불린다" 라고 말했다. 아래의 것은 그러한 아홉 개의 비유 또는 상징에 대한 개관이다.

가. 공간적인 비유

칼빈에게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된 비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이중적인 움직임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람에게로 내려 오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오르도록 하신다. 즉 우리가 오를 수 있도록 하나님은 내려오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움직임이 구 언약(구약) 아래서 이스라엘이 드렸던 예배에서 이미 발견된다고 믿었다. 고대 성전 의식과 언약궤에 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장소에 묶여 있지 않으시므로, 그의 백성들이 자신을 땅의 상징으로 묶어놓기를 결코 원치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그들에게로 내려 오심으로 그들을 높이 그 자신에게로 들어올리신 것이다... 그는 느린 인간들이 점차적으로 하늘에 오를 때까지 친밀한 방편으로 그 자신을 소개하는 매개체로써 상징들을 사용하신 것뿐이다." 이러한 회화적인 방법으로 칼빈은 공중 예배의 내적 역학을 말하자면 우주적인 수직 축 위에서 설명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움직임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은 언제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움직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의 사상에서의 중심적이고 특징적인 것,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능력에 자신을 맞추신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칼빈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낮추시고, 황송하게도 인류를 향하여 "밑으로" 움직이시는 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칼빈이 가졌던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류의 연약함 사이의 커다란 대조를 전제로 하고 있다: "천지를 채우시는 하나님은 그 자신의 위치를 바꾸지 않으시지만, 그의 임재의 어떠한 증표를 우리에게 주실 때는 언제나 우리에게로 '내려오신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보잘것없는 형편에 자신을 맞추는 방법의 표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수용"은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나타나심, 성육신, 그리고 성경을 주심 등의 여러 가지 방편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주제의 연구에서 잘 눈에 띄지 않는) 또 다른 경우의 "수용"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예배를 위한 의식들을 공급하심에서 발견된다.

칼빈에 의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의식들을 공급하셨다: "하나님은 기초적인 의식의 사용을 통하여 그들이 가졌던 연약하고 성숙되지 않은 이해에 자신을 맞추셨다. " 또한 교회의 시대인 신약에서 설교와 특별히 성례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수용의 선물이다. 예를 들면 1541년에 발간된 "성찬에 관한 소고(Short Treatise on the Lord's Supper)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너무나도 어리석어서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가르침과 설교에 의해 제시되었을 때 마음의 참된 담대함을 가지고 그를 영접할 수 없음을 보시고, 아버지께서는 (그의 긍휼로부터) 이 일에 우리의 연약함에 맞추기를 전혀 싫어하지 않으시고 그의 말씀에 가시적인 표식을 첨부 하심으로써 그 표식에 의하여 그의 약속의 본질을 나타내어 우리를 확신 시키고 견고하게 하시며, 우리를 모든 의심과 불확실함으로부터 건져내기를 원하셨다."

이렇게 설교, 기도 및 성례를 포함한 교회의 외적인 의식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낮아짐" 또는 "수용"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예배에서 이러한 "아래로의" 첫 번째 움직임은 하나님의 백성에 의한 "위로"의 움직임, 즉 마음을 위로 들어올림(sursum corda)에 의하여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위로 상승이라는 표현은 파렐(Guillaume Farel)의 글에 화답하면서 칼빈의 저서 전체를 통하여 울려 퍼지고 있으며, 공중기도, 설교, 그리고 성례에 관한 거의 모든 칼빈의 글은 하나님에게로 "오르기" 위하여 이러한 방편들을 사용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삼하 6:1-7에 대한 칼빈의 설교는 이러한 전형적인 예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이 땅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우리의 감각을 세상 위로 올리고, 우리 자신을 믿음에 의하여 그의 영원한 영광으로 올려야 한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올라오도록 우리에게로 내려오신다. 이것이 왜 성례들이 사다리의 층계에 비교되는가 하는 이유이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거기 가기를 원하지만, 슬프게도 날개가 없다. 또한 우리는 너무 작아서 그것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찾으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로 내려오실 때, 그것은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와 같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조금씩, 그리고 점차적으로 사다리를 한 번에 한 칸씩 올라가게 하려 함이다."

공중 예배는 사다리와 같다는 표현보다 칼빈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분명히 나타내는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올라감"은 무슨 결과를 가져오는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것을 이룰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의 열쇠는 칼빈이 자주 사용한 "영적 예배"이란 용어에서 발견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에라스무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올라감은 순전히 영적인 것, 즉 시편 95편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와 같이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그들의 눈을 천국으로 들어 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칼빈이 중요하게 여기는 구절은 그의 주석, 설교, 예배의식에 관한 비판의 글 전체를 통하여 여러 번이나 언급한 바 있는 요한 4:21-24가 될 것이다. 그의 주석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영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라고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림자와 실체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이 성령과 외적 비유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마음의 내적인 믿음만이 기도와 양심의 정결함 및 자기 부인을 만들어내어 우리가 거룩한 제물로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드려지도록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성령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칼빈이 설명하는 하나님에게로의 올라감은 마음이 주목하는 방향이 외적인 형태로부터 떠나서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영적 예배"에 대한 강조는 칼빈에게 있어서 두 번째의 중요한 비유를 소개하는데, 그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올라가는 방편이 되는 영적 예배는 가장 근본적으로 인간의 "내적"인 것이다: "그(선지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말할 때 그들은 그것을 제단, 제물, 씻음 같은 외부적 행위에 의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영혼 안에서 있는 일이므로, 이것은 사람들이 그것에 의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한다고 선포하는 외부적 표식에 의하여 결코 설명될 수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외적 예배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외적 행위를 하나님 섬기는 일에 적용하는 것은 불충분하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마음의 내적 상태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적인 진실성만으로는 충분하지는 않다. 외적인 표현이 또한 필요하다. 창세기 12장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이 점을 나타내기 위하여 농사의 예를 들고 있다: "마음의 내적 예배는 사람들 앞에서의 외적 고백이 추가되지 않는다면 충분하지 않다. 신앙의 합당한 자리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 뿌리로부터 그 후에 그 열매가 되는 공적인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위로/아래로나 안/밖 등의 언어가 위에서 언급된 "예배의식에서의 죄"와 어떻게 결부되고 있는지를 주목하라. 위선은 내적/외적 관계를 오용하고 침해하는 것이다. 반면에 미신은 예배에서 위로의 움직임에 대한 훼손이다. 여기까지를 요약하자면, 칼빈이 가졌던 예배의 신학은 부분적으로 그가 간단한 위, 아래, 안, 밖 등의 전치사들을 사용하는 데서 발견된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의식에서의 표현을 위한 필요를 채우심으로 인간의 능력에 적응하시며, 예배하는 자들은 영적 예배를 드리고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올림으로써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가장 근본적으로 이것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구체적이고 공적인 방편을 통하여 그 표현이 외적으로 주어진다. 시편 9:11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이러한 용어가 얼마나 자주 쓰이고 있는가를 주목하라:

"그 때에 외적 상징에 의하여 도움을 받아 그들의 마음을 이런 것 이상으로 들어 올려서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면, 신실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식적인 예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의 임재의 실제적인 증표를 가시적인 성소에서 주셨지만, 그의 백성들의 감각과 생각을 땅에 있는 것들에게 묶어둘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외적 상징들이 신실한 자들로 하여금 천국으로 오르게 하기 위한 사다리 역할을 하기 원하셨다. 성례와 모든 외적인 행위들을 제정하셨을 때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도는 그의 백성의 연약함과 약한 능력을 고려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것들을 참되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그의 천국 영광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영적으로 찾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지, 우리 마음을 이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게 하거나 육신의 헛된 것에 고정시키려 함이 아니다."

이러한 위로, 아래로, 안에 및 밖에 대한 생생한 설명은 칼빈이 예배에 관하여 가졌던 이해의 내용을 잘 요약해서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방편이다.

나. 감각적 비유

우리가 이미 언급한 전치사를 넘어서 이제 두 번째 소개되는 비유들은 예배의식의 행위를 인간의 감각적 경험에 의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것들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비유는 말하기와 듣기이다. 즉 예배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레미야 7장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참되고 바른 예배와 봉사의 주요 부분은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을 듣는 일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예배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이사야 11:4를 설명하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지자가 '그의 입술의 숨결로' 말한다고 할 때, 이 표현은 그리스도에게만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에 의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입이 자신의 입과 같이, 그리고 그들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같이 여겨지기를 원하는 방식을 통하여 그들에 의하여 일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시각적인 성례의 표식 속에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말씀과 표식 사이의 구분을 유지해야 하지만, 표식이 우리의 눈에 뜨이게 되자마자 말씀은 또한 우리의 귀를 울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도록 하자." 따라서 하나님은 예배에서 말씀과 표식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기도와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말이며, 따라서 칼빈은 기도를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예배는 이미지 또는 거울이다: "말씀, 성례, 공중 기도, 그리고 이런 종류의 다른 도움들은 거울 또는 이미지에서와 같이 이러한 방편들을 통하여 그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악한 경멸에 의해서가 아니고는 소홀히 여겨질 수 없다." 이러한 비유적, 영적 안목은 어떤 면으로는 예배의 외면적 형태를 보는 물질적이고 문자적인 안목과 연결되어 있다. 구약의 형상들은 "외형적인 이미지 아래에서 영적인 진리가 그들의 눈에 보이도록" 의도된 것이다. 따라서 외적인 형상에 대한 안목은 (사람들을) 바른 영적 안목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것은 성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자는 그 자신의 눈으로 성례를 보았을 때 그들에 나타나는 물질적인 시각에만 멈추지 말고, 그 계단에 의하여(필자가 앞에서 유추로 언급한 바와 같이) 경건하게 묵상하는 가운데 성례에 숨겨진 높은 신비에게로 올라가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성례는 "마치 그려진 그림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나타내며, 생생하게 그리고 형상과도같이 묘사된 그것들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7세기의 우상 파괴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성찬을 그리스도에 대한 "유일한 형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물질적인 시각과 영적인 인식 모두는 앞에서 언급한 예배에서의 내적, 외적, 아래로, 위로의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내려오셔서 예배의 외적인 형상들을 제공하셨으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바른 내적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거울이나 이미지 비유는 특별히 부분적으로는 시각을 통하여 경험하게 된 성례에 있어서 적절한 것이다: "이러한 옛적의 성례도 지금 우리들의 성례가 의도하는 것과 같은 목적, 즉 사람들을 지도하고 손을 이끌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거나, 아니면 이미지로서 그를 나타내고 그가 알려지도록 보여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자주 언어와 시각의 비유들을 함께 사용하곤 했다. 어거스틴의 혼합된 비유와 베르미글리 (Peter Martyr Vermigli)같은 16세기의 신학자들로부터 받아들인 비유를 따라 칼빈에게 있어서 성례는 가시적인 언어였다. "하나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시적인 언어 또는 조각물과 이미지 외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은혜는 언어가 보다 더 완전하게 나타낸다"라고 그는 말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이것을 구두로 나타내는 표식(vocal sign)이라고 부르고 있다.

칼빈이 말하는 감각적인 이미지는 맛보는 일 또는 먹는 비유로 그 끝을 맺고 있다. 예배는 영양공급, 즉 영적 양식을 주고받으며 맛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비유는 가장 자연스럽게 성찬에 적용될 수 있다. 성찬에 관한 칼빈의 글은 구절마다 계속해서 이 비유를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

"성찬에 제시된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우리는 유추에 의하여 영적인 것들로 인도된다. 따라서 떡이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 주어졌을 때, 우리는 단번에 이러한 비교를 깨달아야 한다: 즉 떡이 우리의 몸에 영양을 공급하고, 지탱해주고, 생명을 유지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고 살리는 유일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또한 피의 상징으로 제시된 포도주를 볼 때, 우리는 포도주가 몸에 주는 유익을 생각하여 같은 것들이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우리에게 전가됨을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유익들은 우리를 살지게 하고, 새롭게 하고, 힘을 주며,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양식의 공급은 결코 성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복음의 제시와 성찬 모두는 이러한 영적 양식 공급의 예들이다: "매일 그가 복음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에게 참여하도록 제공할 때, (그리고)... 그가 이렇게 성찬의 거룩한 신비에 의하여 자신을 주심을 인칠 때, 이것(영적 양식으로서의 그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다."

영적 양식의 비유는 다른 비유들의 정신적 및 지식적인 성격을 보완하고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히 중요하다. 게리쉬(B. A. Gerrish)가 언급했듯이 "때때로 공간적인 용어는 정신적 또는 인식적인 작용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상징에 의하여 초청되어 우리는 우리의 눈과 마음에 의하여 하늘로 올려지는데, 이것은 예배의식의 '마음을 들어올림'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이 여기에서나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는, 순전하게 정신적이거나 인식 작용이 아니라 몸을 먹인다는 내용에 관한 모든 것을 부정한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 "

또한 이 세 개의 감각적 이미지 모두가 어떻게 (적어도) 문자적인 단계와 비유적인 단계의 두 단계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을 들으며, 성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그것을 주목하고 필요를 공급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성찬을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을 들으며, 설교를 통하여 영적 양식을 먹기도 하는 것이다.

다. 추가적인 이미지

이러한 공간적이고 감각적인 비유들은 그 대부분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도출된 또 다른 비유들에 의하여 보충되고 있다. 그 첫째는 제사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칼빈이 가졌던 구약 성경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과 높은 견해로 인해서 그의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두 언약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에서 칼빈이 발견한 근본적인 연속성은 그로 하여금 신약 교회의 예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구약의 종교의식(제사)이 갖는 양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는 이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말은 율법에 따른 의식과 이제 복음에서 명령 되고 있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영적인 방법 사이의 유추를 이해하기 위하여 받아들여져야 한다. 선지자의 말이 그 때에는 비유적이었지만, 그 의미는 매우 분명하다. 즉 어디에서나 하나님은 경배 되고 찬양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제사는 무엇인가? 사도가 히브리서 마지막 장에서 말한 것에 의하면 그것은 기도와 감사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신구약 사이의 연속성의 문제로서, 신약성도의 예배는 이스라엘의 예배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비연속성이 있다. 이 마지막 구절이 의미하듯이 이러한 비연속성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세대가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는 방법"을 따르고 있다는데 있다. 문자적이고 물질적인 행위, 예를 들면 짐승을 불태우던 것이 이제는 덜 문자적이며, 더욱 비유적이 되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앞에서 인간이 하나님께로 오름을 설명할 때 사용되었던 용어인) "영적인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그의「교회개혁의 필요성」(The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에서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영적으로 그를 경배할 것을 요구하듯이,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명하시는 모든 영적 제사를 드리도록 열심히 촉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시는 그런 형태이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확실하고도 잘못됨이 없는 경배의 방법임을 나는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증명을 받은 유일한 제사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구약 제사의 의미와 목적을 단번에 이루셨다는 데에서 칼빈은 비연속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칼빈은 성례가 이 제사를 새롭게 반복하거나 효력이 있게 한다는 어떠한 흔적도 반박했으며, 성찬을 교회의 자기 제사(self-offering)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꾸준히 반대했다. 그는 특별히 성찬이 제사라고 하는 해석에 대하여 가장 강한 비판적인 언어를 사용하였다:

"비록 교황주의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린 제사와 그들 자신이 오늘날 드리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천 번이나 소리쳐 외칠지라도, 나는 그리스도의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제사들을 그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반복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사도 자신의 입으로부터의 말을 주장하고자 한다. "

(우리의) 예배는 제사이지만, 그것은 찬양의 제사이지 속죄의 제사가 아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자들인 우리 자신이 제사장이다: "우리 자신들은 부정한 자들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으로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며,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의 제사가 받아들여지고 하나님 앞에서 향기 나는 것이 되도록 하늘 성소에 자유롭게 들어간다."

제사와 함께 언약의 성립은 칼빈의 성경 신학에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칼빈의 구약 주석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각종 언약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이러한 언약들을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능하게 된 가장 중요한 관계의 예로 보았다. 외적인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관계를 조인하고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구약 제사들은 언약에 표현된 대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향한 방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된 제사의 의도는 그의 백성들을 그 자신에게 보다 가까이 묶어 놓으며, 그의 언약을 조인하고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언약 관계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칼빈에게 있어서 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의 범주, 즉 인간과 하나님의 연합이라는 범주의 한 부분이다. 칼빈은 성소에서의 봉사를 "하나님과의 교제의 거룩한 관계"라고 표현했다. 신약시대에 이러한 연합은 칼빈이 "우리 주께서 그것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이끄는 성례"라고 말했던 성찬에서 특별히 실현된다. 앞에서 언급된 공간의 이미지를 되새기면서 칼빈은 성례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그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가 그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사다리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구약의 제사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묶는 것이었듯이, 신약교회의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 드리는 교회를 연합하는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칼빈은 공중 예배를 "믿음의 학교"로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참된 신자들이 모일 때면 언제나 그들이 생각해야 할 목적은 그들 자신의 신앙을 훈련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받은 혜택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에 진전을 가져오며, 그들 신앙의 하나됨을 증거 하는 일 등이다. 그리고 의식의 목적은 믿는 자들이 "경건의 훈련을 받으며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예배에 더욱 더 큰 진전을 가져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칼빈은 이스라엘의 예배가 사람들에게 신학의 교훈을 가르치는 데 얼마나 유용했는가를 열렬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은 죄의 용서라는 주제에 관하여 제공되었다: "옛사람들은 하나님이 대속, 즉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한 속죄에 의해서만 만족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러한 의식들 안에서 훈련되었다." 중보자에 관하여는: "그들이 언제나 눈앞에 상징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중보자에 의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감을 얻을 수 있다는 깨우침을 얻은 것은 옳은 일이었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에 관하여는: "사죄의 의식은 고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죄 씻음을 추구하며 육신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두 가지 모두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짐승이 제단 위에서 죽임을 당할 때,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죽음의 죄책이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칼빈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의식과 상징은 믿음을 장려하고 자극하는데 유익하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가리켜 "버팀목," "자극제," 및 "훈련" 이라고 자주 말했다. 의식과 표식들은 신자들을 믿음 가운데 가르치고, 자극하고, 확신 시키는데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회개의 외적 표식이 갖는 유용성을 살펴야 한다. 이러한 외적 표식들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 알고 혐오하도록 자극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것들이 우리를 자극하는 한 그 (제사) 의식들은 "회개의 원인"이라고 불릴 수 있으며, 증거라는 차원에서 그것들은 또한 "결과"라고 불릴 수 있다. 즉 그 의식들은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죄의 표식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우리가 죄인이요 죄책이 있음을 더욱 인정하도록 우리를 자극시키므로 "(회개의) 원인"이며, 회개가 앞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러한 의식들이 진지하게 집행하게 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것들은 "(회개의) 결과"이다.

공중 의식에서의 예배는 순전한 믿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또한 이러한 믿음을 일으키고, 견고하게 하며, 자극하기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예배를 세상에 대한 증거로서 설명하고 있다. 개별적인 그리스도인과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이러한 구체적인 유익 외에도 그는 또한 종교 활동이 모인 교회를 넘어서는 특별한 목적이 있음을 보았다. 이 목적은 세상을 위한 것으로서 두 가지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며, 그것은 또한 세상과 예배하는 공동체 사이의 분명한 구분을 나타내는 분리의 행위이다. 이 두 주제들은 이삭의 제사에 대한 칼빈의 분석에 나타나 있다:

"다른 구절들로부터 우리는 모세가 여기에서 공중 예배를 말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내적 기도는 제단을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특별한 장소의 선택을 요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성도들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신앙은 사람들 앞에서 증거를 유지해야 하므로 이삭은 제단을 세우고 봉헌한 후 자신이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가 됨을 고백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을 이방인들의 부패한 의식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증거와 분리의 유익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또한 이러한 행위들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부르도록 인도하기를 원했다: "우리 각자가 받은 개인적인 유익들을 되새길 때, 우리는 연합하여 힘을 얻어서 공적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도록 하자.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감사를 목격하게 할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예를 따르도록 공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신자의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간의 보다 큰 연합 및 교회의 세움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증거를 가져오게 된다.

요약하자면 칼빈은 공중 예배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일련의 이미지들을 제시하고 있다. 즉 예배는 사다리, 과일나무, 대화, 거울 또는 이미지, 잔치, 제사, 계약의 조인, 주인 된 교사 및 증거와 같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상상력과 높은 기대로 가득 찬 수사로서 공중 예배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3. 신학적 구조: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삼위 일체적인 이해

이러한 이미지들은 칼빈이 가졌던 예배에 대한 견해가 지녔던 힘, 설득력 및 상상력 등을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들이 지닌 완전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보다 큰 신학적 맥락에 놓을 필요가 있다. 만일 앞에서 필자가 개략적으로 소개한 모든 설명과 예배의 이미지로 돌아가 칼빈의 문장을 도표로 나타내자면, 그 문장에서의 주격 또는 주어는 모인 교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사람들은 주격이 아니라 여격(dative) 또는 목적격(objective)임이 분명하다.

칼빈이 가졌던 비전의 중심에는 예배가 하나님의 행위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함을 따라서 순수하게 그리고 바른 양식으로 경배하는 신실한 자들이 경건한 행위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곳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임재 하시며, 그들 가운데 좌정하고 계신다." 또한 성례에 관해서 칼빈은 그것들이 "엄격하게 말해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세례 또는 성찬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그에게로 나아오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 편에서 보자면 세례는 수동적인 일이다. 우리는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그것에 가져가지 않는데,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쌓여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올드(Hughes Oliphant Old)가 거듭해서 주장했듯이 "칼빈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에서 활발하게 일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를 경배할 때, 그는 교회의 예배 중에 일하신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예배는 인간의 창의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의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레이(John Leith)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창조주와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분이 실재하신다는 느낌, 하나님의 객관적인 임재의 느낌, 일반적으로 삶 가운데와 구체적으로는 예배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 대한 감각은 칼빈이 했거나 글로 쓴 모든 것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칼빈이 가졌던 예배에서의 하나님 중심의 견해는 보다 완전히, 그리고 정확하게 삼위일체적인 비전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각 인격은 내적 움직임이나 예배의 본질에서 각각 특정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성부 하나님은 행위자요, 주는 자, 시작하는 자이시며, 성자 하나님은 중보자이며 특별히 제사장의 직분에서 그러하다. 성령 하나님은 격려자요, 가능하게 하는 자요, 효과적으로 만드는 자이다. 간단히 말해서 부틴(Philip Butin)의 문구를 빌리자면, 예배는 "삼위일체의 행위"로서, 그 안에서는

"산자들의 예배에서 '아래로의' 움직임이 아들을 통하여, 교회를 향한 아버지의 은혜롭고 자유로운 그의 성품의 계시 안에서,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시작된다. 더 구체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이것은 성령의 능력주심과 조명에 의하여 성경에 따른 말씀의 선포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 예배에서 인간의 '위로의' 움직임은 기도와 성례의 집행을 중심으로 발견되며...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된다. 인간의 반응(즉 "찬양과 감사의 제사")은 내재하시는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부터 일어나게 된다. 그 성령 안에서 기도, 헌신, 그리고 순종이 예배의 합당한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께 그 자신도 완전하게 하나님이며 또한 인간으로서 교회 예배의 중보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려지게 된다."

요약하자면, 칼빈이 보았듯이 교회에서의 공중 예배를 위한 주일 모임은 평범한 모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로 가득 찬 사건이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묘사되고 실현되는 장(場)인 것이다. 공중 예배에서 하나님은 예배가 드려지는 분일 뿐 아니라, 또한 교회의 예배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분이다. 공중 예배, 즉 공중 기도, 설교, 그리고 세례와 성찬의 집행을 통하여 하나님은 활발하게 인간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끄신다. 따라서 가장 고상한 언어만이 이 사건의 중요성을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칼빈 자신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한 예로서, 우리 육신의 연약함이 허락하는 한 우리는 믿음을 활용함으로써 하나님에게까지 들려 올려지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 성례, 거룩한 모임, 그리고 교회의 모든 외적 다스림의 목적이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니면 무엇인가?"

4. 결론의 말

이제는 결론적으로 여섯 가지의 언급을 하고자 한다. 그 중 셋은 역사적인 것이요, 그리고 나머지 셋은 신학적인 것이다. 이 각자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글이 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몇 개의 문단으로만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가. 칼빈이 반드시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시작한 사람은 아니다.

필자는 이상과 같은 칼빈의 사상에 대한 설명에서 그의 공헌이 유례없는 것이요, (이러한 분야에서는 위험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는) 독특하거나 독립적인 것이라는 어떤 제안도 부정하고자 한다. 이 분석의 다음 단계는 이 주제들을 칼빈이 사용한 교부들의 글뿐만 아니라 부서(Bucer), 에라스무스(Erasmus), 파렐(Farel), 베르미글리(Vermigli) 등의 사람들의 것과 비교하는 일이 될 것이다. 칼빈은 교부들의 작품 및 16세기의 많은 대화 상대에 널리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접근방법이 갖고 있는 위험은 칼빈을 역사적인 문맥으로부터 단절시켜 추상화 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상, 예배에 관한 그의 주요 주제들(즉, 제사와 언약 갱신 등의 성경적 이미지의 사용, 예배에서의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예민한 감각)에서 칼빈은 몇 개의 고대의 성경적이고 교부들이 사용한 주제들을 되풀이하고 있다. 실제로 "영혼의 내적 올라감"이라는 표현은 어거스틴의 주제로서, 맥긴(Bernard McGinn)의「서양 신비주의의 역사」(History of Western Mysticism)에서 훌륭하게 분석되어진 바 있다. 그러므로 올드(Hughes Oliphant Old)의 학위논문이 "개혁주의 예배의 교부적 근원"에 관한 것임은 당연하며, 칼빈이 그의 예배의식에 "고대 교회의 관습에 따라서"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당연하다. 예배의식에 대한 칼빈의 신학은 삼위일체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이요, 복음주의적 이고, 정통주의 등 놀랍게도 포괄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칼빈 신학의 유산이 이 분야에서 중요한가? 그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칼빈은 이러한 유산을 그림과 같고, 힘있고, 기억할만한 수사로서 구체화하는 능력을 가졌다. 둘째, 이 주제에 관한 칼빈의 유산은 이 주제에 대하여 그가 쓴 많은 분량의 글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다. 칼빈은 교회 역사 가운데 거의 어떠한 주요 인물만큼이나 예배의식의 신학에 관하여 많은 양을 저술하였으며, 이것은 그의 주석과 설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특별히 명확해질 것이다. 셋째, 칼빈의 저술들은 당시의 출판자들에 의하여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책들을 희귀 도서나 쌓아 놓는 골방으로 보내고 지난 400년간 수많은 설교자들의 책꽂이에 머물러 왔다.

나. 이 주제에 대한 칼빈의 저술의 범위와 그 의미는 보다 폭 넓은 칼빈 연구에서 흔히 인식되지 않았다.

칼빈 주석을 읽어나가는 어느 정도 포괄적인 프로그램을 마친 후에 필자는 칼빈이 얼마나 자주 공중 예배 의식에 대해서 언급했으며, 그리고 심지어는 이 주제와 특정 구절의 연관성이 별로 희박할 때에도 그러한 언급을 해왔는가를 발견하고는 놀라게 되었다. 사실 칼빈은 자주 어떠한 예배 행위들(맹세, 하나님을 부름, 찬양과 기도를 포함해서)도 모든 예배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해했으며, 따라서 "교회의 지정된 모임"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로서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예배의식의 신학에 관련된 연구 책자들의 목록은 초라하기만 하다.

필자는 이 주제에 대한 학문 세계의 관심 부족을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다. 예배의식을 다루는 많은 학자들은 그가 기록한 의식의 단순함, 매주의 성찬 및 자국어로 된 찬송가 등만을 알아 볼 뿐, 사실상 그의 예배의식의 신학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의 부족은 또한 칼빈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흥미로운 하나의 예는 "하나님의 수용"을 언급한 칼빈의 신학에 대한 논의이다. 이 주제에 대한 고전적 연구는 배틀스(Ford Lewis Battles)의 것이다. 배틀스는 창조된 우주와 인간의 몸은 이러한 수용의 형태임을 언급하며, 성경과 성육신이 하나님의 수용의 대표적인 예로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시각적인 표식과 예배의식 행위를 이러한 수용의 표식으로 보는데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성찬 자체에 대해서도 몇 줄만을 할애하고 있다. 라잇(David Wright)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수용에 대한 저술들을 훌륭하게 보충하고 있지만, 교회의 예배의식 행위에는 단지 몇 개의 참고문헌을 언급했을 뿐이다. 셀링거(Suzanne Selinger)는 성찬을 수용의 표식이라고 보았으나, 이보다 훨씬 큰 주제와 관련된 글에서 단지 지나가는 말로써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수용"이라는 칼빈의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가 가졌던 공중 예배에 대한 이해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다. 이 주제에 대한 칼빈 연구는 장르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칼빈의 예배신학을 보는 사람들이 칼빈이 사용하는 이러한 이미지를 깨닫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기독교강요 이상의 것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에머리(Emory) 대학에서 끝낸 주요 논문이나 남아공 역사가에 의한 학술 논문 모두는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대로" 라는 제한된 항목을 가지고 칼빈의 예배 신학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강요는 예배의식에 관한 칼빈의 많은 긍정적인 진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종종 그의 많은 비판에 의하여 파묻혀지곤 한다. (현재의 상태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의식의 유형이 기독교강요 이상으로 벗어나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예배의식의 구문과 의식 그 자체가 진술하는 그 정도까지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스핑크스(Bryan Spinks)가 말했듯이 (일반적으로) "칼빈이 다른 사람들의 예배의식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이유로 인해서 그의 깊은 교리는 적절한 예배 의식적 표현이 주어지지 않았다." 미래의 칼빈의 예배의식 연구자가 우연히 칼빈의 설교 무더기와 주석과 함께 (칼빈주의 연구 기관인) 헨리 미터 센터(Meeter Center)에 갇혀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기를!

라. 칼빈이 가졌던 완성된 예배신학은 하나의 예배의식의 신학이 가진 구조와 논리가 어떻게 보다 전통적 으로 뛰어난 신학적 논제들을 반영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초점이 되는 경우는 예배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라는 개념으로서, 이것은 칼빈의 구원론적 구조와 정확한 연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활동을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다른 신학적 주제들(예를 들면, 믿음의 교리, 섭리의 교리 등)과 마찬가지로, 예배의식의 신학은 어떻게 예배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에 의하여 감동되어지고 가능하게 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예배의 주요 활동자에 관해서 묻는다면, 칼빈은 (믿음에 관해서도 그러했겠듯이) "성령"이라고 답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가 우리 가슴속에서 효과 있게 만들며, 성찬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우리의 찬양과 기도를 감동시킨다. 성령은 예배에서 위와 아래로의 모든 움직임을 (실제로) 만드는 분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역사상 모든 최고의 신학자들은 예배의식의 신학을 보다 큰 신학 체계와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예배의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모습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것은 믿음의 교리 측면에서 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교리, 그리스도의 사역의 교리, 그리고 많은 다른 교리들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칼빈의 예배의식 신학이 가진 지속적인 매력의 일부는 그의 입장이 이러한 신학체계 전체와의 대화 가운데서, 그리고 전체적인 신학체계의 견지에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많은 연구를 통해서 칼빈이 가졌던 예배의식의 신학과 그의 다른 신학적 주제들간의 연결된 부분들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마. 칼빈의 글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올라감과 내려옴의 이미지는 칼빈의 사상에서 (불필요하게도) 이원론의 망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모든 이러한 위로/아래로의 이미지는 칼빈이 (몹시도 간단하게, 그리고 일부러 자극적으로 표현하자면) 고딕 건축물, 그레고리의 영창, 그리고 신비주의적 기도 모두가 예배를 드리는 자로 하여금 이 땅의 현실에서 벗어나 천국의 안식으로 들어가도록 돕는 것을 말하는 신플라톤주의 세계를 본 따고 있다는 비판을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 셀링거는 이 일에 관하여 "역사가들은 종종 칼빈을 (이원론의) 비판으로부터 건져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마도 상당히 직접적인 연관이 실제로 있는 듯하다. 칼빈이 플라톤주의로 기울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또한 사다리 이미지가 있다. 이것은 영혼이 하나님에게로 올라간다는 글을 써온 교부시대로부터 오래된 기독교 전통의 영향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16세기에 만연되었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칼빈이 서신을 교환한 나바르(Marguerite of Navarre)의 시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에 대한 가장 최근의 저술은 Celestial Ladders: Readings in Marguerite of Navarre's Poetry of Spiritual Ascent이다.) 이러한 신플라톤주의 구조와의 역사적 연관과 성향은 찾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필자는 이 문제가 처음에 인정된 것보다는 훨씬 복잡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으로 올라가면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발견한다는 칼빈의 말을 기억할 때 특별히 그러하다. 거기에 인간 예수께서 계시다는 것은 신플라톤주의와 연관된 영원한 안식이 있는 천상의 다른 세계와는 조화되기 힘든 생각인 것이다.

또한 칼빈의 글에는 예배의식 행위의 물질적 유형을 강조하는 짧고 멋진 글들이 자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설교를 설명하면서 칼빈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다...이 땅의 몸을 가진 우리에게 측량할 수 없는 보물이 주어진다" 라고 말하고 있다. 성례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진리가 표식들과 구별되기는 해도 그것들로부터 분리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성찬에서 목사에 의하여 우리의 손에 주어지는 (가령) 떡 같은 표식을 바라보고 느낀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의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그곳으로 가야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갖게 되는 경건한 자들이 그를 실제로 즐기도록 목사의 손에 의하여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믿는 자들로 하여금 천국의 실체를 묵상하도록 돕는 떡에 대한 느낌인 만짐의 감각이 중요하다. 필자는 칼빈으로 하여금 이원론의 가장 큰 오류를 피하도록 한 것이 그의 삼위일체적인 용어라는 부틴 (Philip Butin)의 말에 동의한다. 부틴은 칼빈의 견해가 "육신이나 이 세상이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는 신플라톤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는 바울의 것이다. 칼빈은 인간적으로 고안되고 요구되는 의식들보다는 영적 예배의 자유를 강조하기 원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은 물질이 아니라 율법, 그리고 그 대상을 잘못 나타내는 규정된 의식적인 일치에 의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인간적인 시도와 상반된 관계에 있다"라고 말한다.

바. 질문들

역사가로서 우리는 "칼빈은 오늘날의 교회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질문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로서의 우리의 역할 외에도 또한 교회의 신학자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도록 하자: 즉 예배에 관한 우리의 논의가 칼빈의 예배의식의 신학에 대한 측정기준에 반대로 작용할 것인가? 예배에 대한 우리의 현재 논의 중 얼마가 실제로 신학적인가? 말하자면 얼마나 자주 우리의 예배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신을 그리고 있는가? 우리의 논의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예배의 기술적인 면이 아니라 내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얼마나 자주 우리는 예배의식의 개혁을 위한 우리의 프로그램을 성경의 가르침에 맞추고 있는가?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얼마나 열심히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는가? 얼마나 자주 우리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하나님 사이의 바른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가? 우리가 예배의식을 위하여 모였을 때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설명을 해왔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술적인 면이나 방법이 아닌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우리의 대화 중 얼마나 예배 중 우리가 한탄하는 것들을 넘어서서 우리의 건설적이고 신학적인 비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그 적절함으로 인하여 관심을 끌고, 그 빛남으로 인해 마음을 불러일으키고...마음속에 효과적으로 침투하도록"우리의 모임을 위하여 교훈적인 이미지를 제공한 적이 있는가? 칼빈이 제공한 수사에 비하면 우리의 것은 종종 보잘것없는 경우가 많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변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제공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질문들은 우리를 칼빈 자신의 교훈에게로 향하게 하며, 그것들은 아래의 충고를 반복하자는 공통적인 결의를 요구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중에 하나로 계산되는 것이 우리 존재의 커다란 목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필수적인 도움과 상호간의 자극과 격려의 수단인 교회 모임의 측량할 수 없는 특권을 우리 자신에게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이 유익한 교훈을 우리 가슴에 새기자. 이것들과, 우리가 공유한 성례에 의하여 한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계획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영생의 소망과 그의 거룩한 이름을 연합하여 기뻐하는 가운데 함께 훈련하시는 것이다."

"칼빈의 예배신학에서 사용된 이미지와 주제들"에 대한 답변

Ward Holder

윗브릿(John Witvliet)의 글은 주제의 구조와 그 내용에 있어서 풍성하다. 그는 매우 중요한 특정 문구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배의식에 대한 칼빈의 접근방법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고 구성해야 할 몇 개의 새로운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미 칼빈의 저술을 학문적으로 사용하는 과정을 돕고 있다. 필자는 그의 글로부터 몇 개의 요점을 고려하여 축하와 제안을 제공하고, 그보다 적은 수의 문제들을 보다 깊이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의 글이 제시하는 큰 강점 중에 하나는 예배의식의 역사가운데 칼빈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기존의 (수동적인) 입장을 배척하는데 있다. "성경의 장관(壯觀)"(기독교강요, 1.6.1)이 우리로 하여금 피조물 전체에서 전에는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하나님을 계시하는 항목들을 볼 수 있도록 한다고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윗브릿도 칼빈을 예배의식의 신학자로 지적함으로써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의 글 처음부터 윗브릿은 예배의식에 관련하여 칼빈이 가졌던 생각에 대한 우리의 근시안("윈시안"이라면 지나친 것인가?)의 타당성을 도전하고 있다. 예배의식의 역사가운데 칼빈의 공헌은 그의 전체적인 저술에서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칼빈 사상의 중요성은 그것이 언제나 몹시 독창적이거나 혁신적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그 내용이 다 밝혀질 수 없는 것이다. 윗브릿이 칼빈의 교리적인 글과 기독교강요로부터 우리에게 더욱 친밀한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함께 묶어 참으로 "우주적인" 예배의식의 신학을 건설한 것은 참으로 커다란 성취이다. 더욱이 칼빈의 체계에서 보다 두드러진 신학적 주제들 안에서 보통 발견되는 (신학적) 연관성이 그의 예배의식 신학에서도 반영되어 있음을 찾아낸 것은 교육적으로 만족스럽다. 제네바 신학계의 교장으로서 칼빈은 한가지 교과과정을 유지하며 그것을 가능한 곳마다 강화시키곤 했던 것이다.

윗브릿이 제시한 근시안에 대한 도전은 "예배의식의 신학에 대한 칼빈의 저술의 범위와 의미가 으레 보다 많은 칼빈 학자들 간에 인정되지 않고 있다"는 그의 두 번째 요점을 다루고 있다. 칼빈을 연구하는 학자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윗브릿이 한 말을 염두에 두고서 얼마간의 칼빈의 신약 주석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자 전에는 일반적인 충고로 보았던 것들이 이제는 거듭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건전한 예배 공동체의 건설에 적용되는 듯이 보였다. 윗브릿은 칼빈 학자들 간에 잘 알려진 "수용"(accommodation)의 주제가 예배의식에서는 무시되어 왔음을 지적했다. 그는 전통적인 연구와 그 후의 연구들은 예배의식의 행위와 시각적 표식들이 어떻게 수용의 주제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가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발견이며, 필자는 지금 이 주제를 보다 깊이 다루어보고자 한다.

윗브릿이 칼빈의 예배 신학에서의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을 간파하고 또한 그가 그것을 맨 앞에 놓은 것은 칭찬할 만하다. 예배의식의 죄로 시작함으로써 윗브릿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지적하고 있다. 칼빈이 예배의식에 관하여 건설적으로 언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그가 배척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절대적으로 확실히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 제시는 특별히 분명하고 간결해서, 그것만으로도 필자는 감사한다. 그러나 불순종, 위선, 미신 및 우상숭배와 같은 피해야 할 함정들을 지적하고 나서, 윗브릿은 이 문제를 계속해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러한 예배의식의 죄들은 그냥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비유의 설명 배면에 있는 이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위선은 참된 예배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과의 관계를 훼손하는 것이며, 미신은 참된 예배가 가진 위로의 움직임을 훼손한다. 따라서 위선자들은 참되고 내적인 영적 예배를 외적인 의식과 혼동하며, 미신적인 사람은 들려 올려져서 하나님께로 가려 하지 않고 땅 위 수준에 머문다.

윗브릿이 암시한, 보다 자세한 조사가 요구되는 또 다른 문제는 칼빈의 공헌을 보다 확실히 그가 속했던 문맥 속에 넣는 일이다. 예를 들어 필자는 윗브릿 교수가 약속한대로 이 자료를 부서(Bucer), 에라스무스, 파렐 및 베르미글리 등의 저자들과 연결하는 글을 보고싶다. 해석 학파의 역사가 주장해왔듯이, 역사적 인물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방법은 그들이 나타난 문맥 안에 놓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배의식에 대한 칼빈의 저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칼빈이 빌려온 것들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하는 일 또한 이러한 예배의식과 그가 형성하려고 했던 예배 공동체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보다 자세한 그의 마음 상태를 알게 함으로써 그가 피했던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이제 필자는 비판적으로 윗브릿 교수에게 세 가지의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그는 칼빈이 가졌던 예배의식의 신학을 고려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글에 언급된 주제와 구절들의 범위는 그가 예배 및 예배에 대한 바른 자세와 예배를 위한 준비에 관해서 훨씬 더 자주 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더 좁은 의미의 용어를 사용하는 데는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둘째의 질문은 명확성을 위한 것이다. 윗브릿은 "이 주제의 연구는 이 주제에 대한 칼빈의 저술 전체(기독교강요와 예배의식 문서 뿐 아니라 주석, 설교, 서신 및 다양한 다른 교회 문서 등)를 고려해야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방법론적인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는 또한 현재 자신의 경향은 "주석에 치중한" 상태임을 지적한다. 그는 분명히 옳다. 그의 자료는 주석에 의존하고 있으며, 특별히 구약 주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의 질문은 그러한 판단이 연구의 결론인지, 아니면 아직은 끝나지 않은 연구의 방향제시인가 하는 것이다. 칼빈의 구약 주석에서 가장 흔하게 자료가 발견되는 것인가, 아니면 시간적 제약가운데 자신의 주장을 보다 설득력 있게 뒷받침 하기 위한 것인가?

마지막 질문은 윗브릿 교수의 두 번째 방법론적 명제에 관한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예배 드리는 자의 관점에서 칼빈의 예배신학을 연구하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무슨 뜻인가?" 만일 이것이 사회 역사에서의 하나의 연습으로 받아들여져야 함을 의미한다면, 칼빈의 펜으로부터 나온 모든 자료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예배 의식이나 칼빈이 만들고자 했던 예배 공동체의 형태를 고려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문제를 명확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흐리게 만든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칼빈이 하나님과 예배 드리는 공동체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 비유에 대한 윗브릿 교수의 견해에 관하여 좀 더 깊이 다루고자 한다. 그는 사다리, 과일나무, 대화, 거울, 잔치, 제사, 계약의 조인, 믿음의 학교에서의 교장선생님 등 칼빈의 비유 사용에 관하여 신빙성이 있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이미지의 잔치가 칼빈의 미학 및 그의 사상에 대한 토렌스(Torrance)의 묘사에 하나의 접근방법을 제시하기 시작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보강하기 위하여 필자는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으로부터 또 하나의 구절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 구절을 살펴보면 칼빈의 예배의식 신학에 대한 윗브릿의 요점 몇 개가 설명되어 있고, 그가 한 말들의 중요성이 더욱 명확하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 3:1에 관하여 주석하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실제로 보는 것이 그의 설교 이상의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교리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마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그림으로 보여지고, 심지어는 그들 가운데서 십자가에 죽은 것 같이 그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타냄은 성령의 능력이 임재 하지 않았다면 어떤 달변이나 연설의 속임수로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바울은 고린도전후서에서 이 사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복음의 사역을 하려는 사람들은 말하고 연설하는 것뿐 아니라, 양심을 꿰뚫고 들어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그의 피가 흐르는 것을 보도록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교회가 이러한 사람들을 가지고 있을 때 교회는 더 이상 죽은 형상인 나무나 돌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그림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형상과 그림들은 부분적으로는 처음에 목회자가 둔해졌을 때 교회당으로 들여오게 되었고, 부분적으로는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말을 할 때 그것이 너무 차갑고 피상적이어서 사역의 능력과 효력이 전적으로 사라진 때의 그림자 들이다."

칼빈은 자신을 차가운 지성인의 하나로 보는 사람들에게 놀랍게도 거친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의 요점은 그리스도의 피가 사람들의 눈앞에 흐르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양심으로부터의 새로운 피가 흐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깨끗한 그리스도보다는 십자가에 달린 피투성이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마음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론 이것은 가장 숙련된 수사가에게도 힘든 요구이며, 오직 성령의 충만함만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이 예배에서 일하시는 분임을 보게 된다. 바울이 가진 설득력으로도 성령이 없이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 편에서의 "수용"이라고 하는 윗브릿 교수의 요점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단순한 말을 양심에 침투할 수 있는 능력으로 만드시며 이와 같은 방법으로 행동하려는 선택이다. 확실히 칼빈은 말, 기술, 그리고 말의 아름다움에는 필요한 능력이 부족함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그것들이 매우 커서 하나님의 능력에 적합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성령이 내려오셔서 설교를 거룩한 사역으로, 복음의 참된 설교로, 벌링거(Bullinger)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의 생각을 적은 이 부분을 결론지으면서 필자는 이 구절이 칼빈의 이미지 사용에 관한 토렌스와의 차이 뿐 아니라, 그가 지적한 공간적 비유와 예배의식에서의 죄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형상 또는 이미지의 숭배는 내적인 영적 예배가 결여된 직접적인 결과로서 오는 것이다. 설교자가 참된 예배를 유지하도록 성령께서 살리시기 위해 필요한 수사적 이미지를 공급하지 못하게 될 때, 거짓되고 외적인 이미지가 그 부족을 채우려 들어오게 된다. 칼빈은 사실상 풍부한 미적 어휘를 가지고 있어서 필요한 어떤 순간에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기를 거절한 것은 듣기보다 보는 것을 선호하여 그 미를 외형화 하려는 시도였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윗브릿의 마지막 요점인 "예배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칼빈이 가졌던 예배의식의 신학에 비추어볼 때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라는 그의 질문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자 한다. 그는 교수나 강사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 뿐 아니라 목회자와 의사에게도 이 질문을 하고 있다. 그는 "예배에 대한 우리의 현재 논의 중 얼마가 실제로 신학적인가?" 라고 묻고 있다. 이것은 칼빈 자신이 교회와 학문을 분리하지 않은 것에 비출 때 중요한 주제이다. 필자는 하나의 목회자로서의 목소리를 이 논의에 더할 뿐이다. 목회자와 교인들과의 연결가운데 이러한 예배의식에 대한 논의에서 신학적인 절박성의 수준까지 오르게 되는 것은 매우 적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가대가 걸어 들어갈 것인가, 또는 예배가 이미 너무 길어질 때 잠잠히 있으라는 쪽지를 돌릴 것인가, 또는 설교자가 걸어 들어오기 전 또는 후에 촛불을 킬 것인가 등의 수많은 잡다한 논의에 밀려서) 우리의 예배가 참으로 성경적인가, 하나님이 감동하고 동기를 부여한 것인가, 또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가 등의 질문들을 너무 자주 잃어버리고 있다. 필자는 "칼빈이 제공한 수사에 비하면 우리의 것은 종종 보잘 것 없는 답을 가지고 있다"고 한 비교에서 윗브릿이 그 답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나누어 가졌으면 한다.

칼빈의 사상이 16세기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그가 발전시킨 예배의식의 신학을 그대로 붙잡아 오늘날의 상황에 던져 넣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불가능은 모든 것을 끝나게 하지 않는다. 윗브릿의 글이 예배의식 역사 가운데서의 칼빈의 위치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자극한 것 같이, 신학적으로 참된 예배의식을 만들려는 우리의 논의가운데 칼빈의 모델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격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