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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 개혁신학, 그리고 예배의 실제

매주 예배를 위하여 모이는 것은 기독교인이 된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특권 중에 하나이다. 매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형성된 공동체를 경험할 기회를 갖는다. 매주 우리는 의미심장한 찬양과 기도의 문구를 표현하는 힘있는 곡을 즐겁게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하는 특권을 가졌다. 매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의 선포를 듣고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매주 (또는 아쉽지만 적어도 매우 자주) 우리는 성찬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한다. 이 모든 것은 중요한 특권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 속에서 많은 것들은 주일예배를 좌절의 시간으로 만들고 있으며, 많은 장애물들이 예배를 특권으로 경험하는 것을 막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일부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자신에게 있다. 가령 우리는 예배 인도자에게서 최대의 것을 기대하면서도, 우리 자신은 거의 또는 전혀 예배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의 일부는 예배를 인도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있다. 우리는 예배의 전통에 불안하게 매달려 있는 것과 사람들의 원하는 바를 따라서 움직이려는 끝없는 변화의 사이를 방황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어떤 교회에서는 이러한 긴장이 심각한 분쟁으로 폭발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어떤 책은 1990년대가 "예배에 관한 전쟁"의 시기라고까지 발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신실하게 기도하며, 또 우리가 모여 예배드릴 때 무엇을, 그리고 왜 할 것인지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도전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이 글은 세 가지의 일을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로, 지난 세대의 예배를 서술하고, 둘째로, 예배에 대한 개혁신학의 가르침 중 그 핵심 요소의 일부를 정리하고, 셋째로, 오늘날의 예배를 기획하고 인도하기 위하여 몇 가지의 실제적인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세 부분은 20세기말의 예배가 가진 놀라운 면들의 일부를 접근하기 시작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 세 가지 각자에 대하여 각주에 보충자료들을 제공하고자 한다.

아래 연구의 중심적인 주제는 "분별력"이다. 현대 북미의 종교문화는 예배를 포함한 교회생활의 모든 면에 대하여 우리에게 엄청난 프로그램과 함께 다양한 가능성을 퍼붓고 있다. 따라서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분별력만이 이러한 문화 속에서 철저히 성경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이면서도, 망가지고 상한 세상에 매우 연관성을 가지며 의미 있는 예배를 가질 수 있게끔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1. 개신교 예배의 최근 역사

이제 오늘날의 예배에 대한 조감도로 시작해보자. 20세기의 마지막 시기의 예배에서 우리를 북미 기독교인으로서 규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2050년에는 역사가들이 우리와 예배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물론 중간지점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으며, 우리는 이 지점에서 완전한 설명을 바랄 수 없다. 그러나 (오순절 계통의 성공회, 주류 감리교인들, 그리고 열정적인 복음주의자들 같은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뒷받침 되어온 것에 비추어 볼 때) 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추측은 미래에 역사가들이 20세기말의 예배에서 네 가지의 조류 또는 경향을 지적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첫째 조류는 전세계적인 초 교파적 예배 운동이다. 이것은 50년 또는 그 이상을 지속해온 예배 학자들, 예배 자료 출판사, 그리고 예배 인도자들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High Church"의 예배와 혼동하지 말아야 할) 이러한 예배는 다음과 같은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 즉 1)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주목하여 예배에서 복음의 풍성함을 알리고, 2) 교인들 편으로부터의 "최대한의, 의식적이고, 또한 능동적인"예배 참여를 장려하며, 3) 고대에 전형이었던 말씀과 성찬을 주일예배의 정규적인 패턴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위한 촉진제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예배와 초대 기독교 예배에 대한 폭 넓은 연구였으며, 이러한 목표로부터 다음과 같은 예배의 행위가 (재)등장하게 되었다: 기독교 연력이 매년 구원역사에서의 일들을 되새기게끔 해주었고, 예배 때 성경의 상당한 분량을 읽으며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설교하도록 추진했고, 강해 설교를 강조했으며, 고대 감사의 기도를 성찬의 일부로서 회복하였다. 이러한 예배의 개혁은 서로 다른 정도이지만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모두에게 널리 수용되었으며, 침례교, 그리스도의 제자, 복음주의,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단 들에 의하여 출판된 예배 자료들은 종종 예배에 사용되는 구절, 찬송 및 양식을 서로에게서 빌려오면서 모두 이러한 방향으로의 움직임을 반영하고 있다. 좀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움직임은 자유주의 감리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을 진지하게 대하도록 했으며, 보수적인 카톨릭에서는 평신도를, 영국국교 목사에게는 설교를, 그리고 어떤 오순절 계통에게는 성례를 진지하게 취급하게 하는 등의 인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북미 장로교회에게 이러한 것들, 예를 들면 본문에 근거를 둔 설교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찬에서 기도의 사용 같은 것은 초대 교회의 관습을 재발견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북미 장로교인 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

둘째로, 거의 모든 기독교 전통에서의 예배가 오순절 계통의 운동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20세기 초엽의 오순절 성령운동과 흡사한 1960년대의 연속적인 부흥은 이내 주일마다의 교회 예배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예배형식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오순절 운동은 몸의 적극적인 사용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예배에 참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별히 이러한 오순절 운동에 특징적인 것은 사색적 및 활발한 찬양과 기도의 노래의 사용, 치유의 예배, 소그룹에서의 사역과 기도 및 (어떤 상황에서는) 방언 등이었다. 이러한 오순절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된 (아마도 이 운동의 제 2 세대인) 것은 찬양과 경배 운동이다. 그런데 이렇게 찬양과 경배를 사용한 예배가 강조하는 것은 활발한 찬양을 예배의 기본적인 행위로 보는 것과, 몇 개의 성경에 근거한 간단한 노래 또는 찬양의 사용, 보다 활발한 찬양에서 보다 사색적인 예배로의 전환, 그리고 평신도 예배 인도자 팀의 사용 등이다.

셋째는 공중예배를 전도의 우선적인 도구로 생각하여 이른바 "앞 문" 전도라고 불리는 것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에 전도문서에서 확산되던 강조는 호구방문 같은 방법을 통한 불신자와의 개별접촉에 있었는데, 1980년대에는 이러한 전략이 매주일 교회에서의 공중모임을 전도의 우선 기회로 요구하는 것에 의해 보충되었다(이것은 많은 교회에게 새로운 전략이지만,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교회에는 새로울 것이 없다). 그리고 이 운동에서 특별히 영향력 있는 사람은 교회성장 전문가 조지(Carl George), 시장분석가 바르나(George Barna), 교회 컨설턴트 쉘러(Lyle Schaller) 등 이었다. 이 광범위한 조류는 예배를 불신자에게 보다 접근하기 쉽게 만들고, 특별히 불신자의 필요와 관심사에 관련된 행사를 계획하도록 교회들을 장려했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북미 문화의 독특한 모형을 파악하기 위하여 사회학적 분석자료들을 이용했다. 그 결과로 새로운 여러 개의 용어, 즉 구도자에게 민감한(seeker-sensitive) 예배, 구도자를 목표로 한(seeker-driven) 예배, 베이비 붐 세대(boomer)의 예배, 시끄러운 세대(buster)를 위한 예배 등이 생겨났다.

넷째로, 문화적 다양성은 모든 배경과 전통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예배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거의 모든 교단의 찬송은 많은 언어로 된 노래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어떤 교단에서는 특정한 문화 전통을 위한 예배서와 찬송을 출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루터교와 감리교회들은 북미에 살면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교회들을 위하여 멋진 예배서와 찬송가를 만드는 중에 있다. 대부분 교단이 겪고 있는 양상과 마찬가지로 북미개혁장로교회도 교단 전체적으로 및 여러 개 교회에서 문화적인 다양성을 체험하고 있다. 실제로 북미 개혁장로교회에서의 예배는 매주 12개의 언어로 드려지고 있으며, 이러한 다양성은 문화 전통간의 음악 및 교재 자료의 공유를 유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네 개의 움직임 모두에 출판업체의 경제적인 요구가 반영되어 있으며, 또한 그 요구에 의하여 이러한 움직임이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20세기의 처음 3분의 2 동안 많은 개혁장로 교회들은 다른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총회에서 인정된 교재와 교단의 출판 사역에 의하여 제공되는 자료들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이제 교회들은 개혁장로교단 출판부에 의해 공급되는 것들 이외에도 큰 독립 출판사로부터 나오는 (기도문, 노래, 찬송 및 연극 대사 등을 포함한) 예배 자료들을 찾고 있다. 한편으로 이것은 일종의 교회 통일운동이다. 이제 우리는 넓은 범위의 다른 개혁교단, 주요 복음주의 운동과 교회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풍성해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것은 우리가 시장판매를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출판 산업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들이 서로 완전히 독립된 것은 아니다. 종종 어떤 특정 교회에서의 예배는 여러 교회로부터 받은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가령 어떤 교회가 합창을 부르고, 기독교 절기를 축하하며, 아프리카와 아시아로부터 온 찬송가들을 부를 수 있다. 언젠가 역사가들이 우리를 보게되면, 그들은 20세기말 북미 개신교에서의 많은 공중 예배의 중심적인 특징을 절충주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역사를 논하고, 왜 이런 조류들을 지적하는가? 필자가 믿기에 이러한 작업은 우리가 가진 분별의 직무를 돕는 중요한 것이다. 즉 이러한 네 개의 움직임들을 확인하는 것은 우리에게 북미에 있는 교회들의 현재 주소에 대하여 균형 잡힌 견해를 제공하는 데 중요하다. 어떤 교회 컨설턴트들 또는 출판사는 예배에 관하여 부정확하고 너무 단순한 견해를 장려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들이 전통적인 예배만 드려오다가 이제는 자라나서 현대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우리는 찬송가를 불러왔었는데, 이제는 찬양을 함께 부른다"라고 말이다. 이러한 견해는 "전통적인 예배"와 "현대식 예배"를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서로 반대되는 예배의 형태로 구분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여러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여러 가지의 예배 형태 속에서 일해왔다. 우리의 즐거운 특권은 만들어진 이 모든 예배의 문구, 노래, 예술 중에서 최선의 것을 분별하는 일이다. 우리는 신나는 찬양의 노래와 고대 성찬을 위한 감사의 기도, 오랫동안 검증된 믿음의 찬송 및 아시아와 아프리카로부터의 힘찬 노래들, 성경적으로 심오한 설교에 대한 전통적인 요구 및 예배가 불신자에게도 접근이 가능하게 만들라는 최근의 요구 모두로부터 배워야 한다.

2. 개혁신학의 예배

그러나 이러한 역사 안에서의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하다. 우리의 분별하려는 노력은 지침이나 안내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성경에 의해서 주어진다.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중심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성경에 따라서" 되어져야 한다고 고집하는 데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갖게 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예배의 근거로 추구하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은 우리에게 예배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가르침 얼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 예배는 마음을 진지하게 드리는 것이다. 위선과 불신실함은 바른 예배에 대한 두 개의 커다란 반대어이 다(창 4:1-12, 사 1:11-17,

? 바른 예배를 위한 두 가지의 덕목은 "신령"(영)과 "진정"(

? 공중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예배에 대한 바울의 짧은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예배가 믿음 안에서 서로를 세우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상기시킨다 (고전 10-14).

? 모든 우리의 삶은 주께 예배로서 드려져야 한다. 예배는 결코 주일에 일어나는 것에 제한되지 않는다 (롬 12:1-2).

?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시편, 찬송, 및 영의 노래"를 부르는 중심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데 있다(골 3:16).

? 세례와 성찬은 주에 대한 순종의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행위들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의하여 준수되어야 함을 구체적으로 명령하셨다(마 28:19, 고전 11:26).

?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마음은 바르게 경외와 놀라움으로 가득 차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적인 접근을 허락하셨으므로(히 4:14-16), 우리는 이러한 만남에 두려움으로 떨 필요가 없다.

이러한 교훈 각자와 많은 다른 것들은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에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구절들을 연구하는 것은 예배 인도자, 교회 협의회 및 예배 위원회의 정규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 예배와 예배 스타일에 관한 많은 의견의 불일치는 교회가 이러한 성경의 중심적인 가르침보다 기술에 더 많이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생기게 된다.

이 글의 목적을 위해서 성경의 가르침, 즉 개혁 전통에서 많은 지도자들에게 예배에 대한 신학적 비전이 되었던 주제를 하나 더 생각해보자. 그것은 예배에서의 주요 동인(動因), 즉 행동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예배 속에서 및 예배를 통하여 활동하시며, 그의 사람들에게 믿음과 순종을 넣어주시고 정화시킨다.

예를 들어 칼빈이 보았듯이, 공중 예배를 위한 교회의 매주 모임은 평범한 모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로 가득 찬 사건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묘사되고 실행되는 장(場)이다.

이러한 비전은 칼빈에 의하여 비유로 더욱 설명되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된 비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양편의 움직임에 관한 것이다. 즉, 모임 속에 그리고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류를 향하여 움직이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오를 수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예배는 위와 아래로의 움직임이다. 하나님이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올라간다. 칼빈은 이것이 이미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행했던 예배에서도 사실이라고 믿었다. 성전과 언약궤에 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한 곳에 묶여있지 않듯이, 그는 그의 백성들을 땅에 있는 상징에만 묶어두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에게로 내려오셔서 그들을 그 자신에게로까지 높이 올리신다... 상징은 하나님이 우둔한 인간에게 자신을 친밀한 방법으로 소개하는 매개체로서, 하나님은 그들이 한 단계, 한 단계 점차적으로 하늘에 오를 때까지 그것들을 사용하신다." 이러한 생생한 방법으로 칼빈은 공중예배의 내적 역학을, 말하자면 우주적인 수직 축 위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역동적인 움직임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은 언제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움직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이 가졌던 생각의 중심적이고 특징적인 것, 즉 인간의 능력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맞추신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낮추시고, 황송하게도 인류를 향하여 "밑으로"움직인다. 그리고 예배에서의 이러한 첫 번째 움직임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가운데 위로 움직임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이 "오름"(ascent) 이라는 말은 칼빈의 책 전체에 울려 퍼지는 후렴과도 같은 것이다. 공중 기도, 설교, 및 성례에 관한 구절 거의 전부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 "오르기"위하여 이러한 방편들을 사용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삼하 6:1-7에 대한 칼빈의 설교는 이러한 전형적인 예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이 땅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우리의 감각을 세상 위로 올리고, 우리 자신을 믿음에 의하여 그의 영원한 영광으로 올려야 한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올라오도록 우리에게로 내려오신다. 이것이 바로 성례들이 사다리의 층계에 비교되는 이유이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거기에 가기를 원하지만,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날개가 없다. 우리는 너무 작아서 그것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찾으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로 내려오실 때, 그것은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와 같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조금씩, 그리고 점차적으로 사다리를 한 번에 한 칸씩 올라가게 하려 함이다..."

공중 예배는 사다리와 같다는 표현보다 칼빈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비전을 인간의 감각으로부터 이끌어낸 비유로써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첫째로 칼빈은 공중예배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시기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칼빈에게 있어서 "참되고 바른 예배의 주된 부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을 듣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분적으로 성경 말씀에 대한 설교로 이루어진다. 이사야 11:4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에 의하여 그들의 입이 그리스도 자신의 입으로 여겨지며, 그들의 입술이 그리스도의 입술로 여겨지도록 일하신다"고 말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시각적이고 성례에서 사용되는 표식(sign)에서조차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우리는 말씀과 표식 사이의 구분을 유지해야 하지만, 표식이 우리의 눈에 접촉될 때, 말씀이 또한 우리의 귀에 들려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예배에서 말씀과 표식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나 말씀의 비유는 칼빈이 가진 하나님 및 하나님의 계시에 관하여 가진 견해에 있어서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공중예배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그가 언급한 유일한 감각적인 방식은 아니다. 공중예배의 본질은 인간의 시각에 비교되어서도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 성례, 공중 기도, 그리고 이런 종류의 다른 도움들은 거울이나 이미지에서와 같이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그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악한 경멸이 아니고는 소홀히 될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공중예배는 대화나 담화 뿐 아니라 거울이나 이미지와도 같다. 그리고 이것은 성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례를 자신의 눈으로 볼 때, 신자는 신체적인 안목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계단에 의하여(이미 필자가 유추에 의하여 언급한 대로) 성례에 숨어있는 고귀한 신비를 경건하게 사색하는 가운데 (위로) 오르게 된다." 따라서 신체적 안목과 영적 지각은 예배의 "아래로"와 "위로"의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내려오셔서" 예배의 외적 형태(즉, 인간의 감각을 통하여 경험될 수 있는 것들)를 공급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일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올라갈"수 있는 것이다.

칼빈에 의한 이러한 감각적 이미지의 모음은 이제 음식의 비유에 의하여 완전하게 된다. 예배는 또한 영적 양식의 공급이요, 주는 것이요, 그것을 맛보고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비유는 성찬에 가장 자연스럽게 적용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실제로 성찬에 대한 칼빈의 글은 특별히 이러한 비유를 나타내고 있다:

"...성례에 설명된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우리는 유추에 의하여 영적인 것들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떡이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 주어졌을 때, 우리는 이 비교를 단번에 이해해야 한다. 즉 떡이 우리 몸에 영양을 주고, 그것을 보존하고, 몸의 삶을 유지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고 살리는 유일한 음식이다. 또한 포도주가 피의 상징으로 설명된 것을 볼 때, 우리는 포도주가 몸에 주는 유익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같은 것이 영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짐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유익들은 우리 영혼에 영양을 주고, 새롭게 하고, 힘을 주고, 기쁘게 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영적인 양식은 결코 성찬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복음의 설교와 성찬 모두가 영적인 양식의 예들이기 때문이다: "매일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로 하여금 참여하도록 하실 때...그가 그렇게 자신을 주심을 성찬의 성스러운 신비로 인치실 때, 그리고 그가 외적으로 지정한 것을 내적으로 이루실 때 그것(영의 양식으로서의 자신의 몸)을 주신다."

요약하자면, 칼빈은 공중 예배를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행위로 보았다. 예배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 말씀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거울을 제시하고,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적 음식을 제공하신다. 그리고서 성령께서는 예배하는 자들을 바로 천국으로 들어올려 하나님 그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시킨다. 간단히 말해서 예배는 기적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개혁 신학의 중심 주제는 예배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설교, 성례, 공중 기도, 찬양, 그리고 구제 등 공동체의 가시적인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이끌려고 일하신다.

필자는 칼빈이 가졌던 예배 신학의 한 면에 대한 이 간단한 설명조차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한한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아래의 내용들은 예배 안에서와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개념의 구체적인 다섯 가지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 이 견해는 예배에 관한 대화의 방향을 재조정하고 있다. 종종 예배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기술에 그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설교자의 의사전달 능력을 분석하고,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음악 스타일을 좋아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하고, 교인 중에 누가 예배의 어떤 특정 행위를 인도하도록 허용될 것인가를 논의한다. 물론 이러한 논의들은 매우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의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질문들을 차선의 자리에 놓도록 우리를 도전하고 있다. 그의 비전은 우리가 순전히 예배의 선물만으로 인하여 기도하며, 감사함이 모든 대화에 스며들고, 또한 공동체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것들에 대한 높은 기대를 가지고 예배를 준비하도록 우리를 도전한다. 또한 그의 비전은 공중 예배가 얼마나 독특한 것인가를 인정하도록 우리를 도전한다. 그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위한 모임이 단순한 인간의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정치적 모임, 학교 이사회 모임, 음악회, 또는 교육적인 강의 등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예배의식의 요점은 가르치거나, 즐겁게 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나누어 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함이다.

둘째, 이 신학적 비전은 예배에 관한 가르침과 설교를 위한 수많은 이미지와 비유를 공급한다. 우리는 예배에 관하여 찬양의 시편(예를 들면, "온 땅이여, 주를 경배하라")으로부터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또한 예배 안에서,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에 관하여 설명하는 많은 구절로부터도 배운다. 이 비전에서의 중심적인 성경구절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시와 약속의 행위를 따르며 그것에 반응하는 언약의 갱신으로서의 공동체 예배를 가르치는 구약의 표현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언급하는 히브리서의 구절, 성령이 우리 기도의 격려자임을 지적하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구절들을 포함한다. 이 구절들은 예배위원회를 위한 경건의 시간을 계획할 때, 목회자가 예배에 관한 설교를 계획할 때, 또는 음악 담당자가 예배의 인도를 준비할 때 출발점으로 사용하기 매우 좋은 곳이다.

셋째, 이 비전은 우리가 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를 인도하고 또한 형성해간다. 우리가 예배를 인도할 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도록 요구하는 일의 엄청난 특권을 의식해야 한다. 우리가 예배를 인도할 때 이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자, 이제 묵도를 하고 나서 찬송을 하겠습니다"라고 (기계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 때 -- 우리의 반응은 조용한 침묵과 기쁨이 가득 찬 찬양을 포함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도록 만든다. 심지어 우리가 찬송을 인도하는 방법까지도 하나님이 교회의 예배 안에서와 교회를 통하여 하시고 계신 것에 대한 우리의 경이와 기대의 느낌을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이러한 관점은 예배가 하나님의 영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요구하는 예배의 순간들을 흐리게 하기보다는 그것들을 강화하도록 우리를 도전한다. 개혁주의 전통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선포하는 예배의 순간, 즉 인사, 죄의 고백 후의 사죄의 확신, 설교 및 축도 등에 높은 가치를 두어왔다. 잘 알려있지는 않지만, 개혁주의 전통은 또한 말씀의 선포 전에 성령의 조명 및 성찬에서의 성령을 위한 기도 등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능력 있게 일하도록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에 가치를 두어왔다. 실상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가 매주 죄의 고백 후의 사죄의 선포나 조명을 위하여 매주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것들을 매주의 예배 양식에 포함하는 것(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이것들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예배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행동에 고정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적합한 예배 행위들이다.

다섯째, 이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공중 예배에서 우리의 설교와 성례의 사용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도록 우리를 도전한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설교 및 성례의 신학과 실천에 풍성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러한 예배의 행위들은 "은혜의 방편"이라고 불린다. 이것들은 또한 "참된 교회의 표식"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가진 문제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이와 같은 고백의 지위를 갖지 않은 어떤 문제들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유산 중 가장 아름다운 문구 중에 하나는 벨직 고백서 (Belgic Confession) 제 33조에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미숙함과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약속을 우리 안에 인치며,

우리를 향하신 그의 선한 의지와 은혜를 맹세하고,

또한 우리의 믿음을 자라나게 하고 또 그것을 보존하기 위하여 성례를 제정하셨음을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그가 주신 구원을 확신 시키며,

그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과

그가 우리의 마음속에 내적으로 하시는 것들을

우리의 외적 감각에 더 잘 보여지도록 복음의 말씀에 이것들을 더하셨다.

그것들은 내적이고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가시적인 표식과 인치심이며,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가지고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 속에서 일하시므로

그것들은 우리를 놀리고 속이기 위한 공허한 표식이 아니다.

그것들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없이는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생동력 있게 예배하는 교회들은 철저하게 성경적인 설교와 그리스도인의 성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례가 어떤 다른 것을 가리키는 단순한 상징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단순히 믿음의 행위나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이 아니다. 성례는 고백서의 용어를 빌리자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방편이다.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도록 주어진 귀한 선물들이다. 어떤 교회들은 성찬을 더 자주 함으로 크게 유익을 받아왔다(우리가 아는 대로 칼빈은 그의 교회에서 매주 성찬을 하기 원했다). 다른 사람들은 초대 교회에서 했던 것과 같은 성찬의 기도를 사용함으로 크게 유익을 받았다(아래를 보라). 그리고 모든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통하여 매주 교회의 모임에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감화시키고, 자라게 하고, 보존하고, 도전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활발하게 일하신다는 지식에서 자랄 때 유익을 얻게 된다.

3. 전통으로부터의 창조적인 계획

이제까지 우리는 최근 역사와 우리의 신학적 유산에 관하여 씨름 해왔으므로, 지금은 우리의 생각을 실천에 적용할 때이다. 어떻게 우리는 이 현대의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예배에서의 모든 변화를 언급하고, 또 변화를 요구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공중 예배를 향한 이러한 비전을 실행할 것인가?

당신의 교회에서의 예배의 계획과 인도를 위한 아래의 다섯 가지 제안을 생각해보라. 이 각자의 제안은 대부분의 예배 전통에서 정규적인 예배의 행위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 생각들은 우선적으로는 예배를 계획하고 인도하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지만, 매 주 모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것이다. 필자는 이 특정한 생각들을 두 가지 이유에서 선택했다. 첫째, 이것들은 주어진 예배 행위의 근본 목적을 흐리기 보다는 강화시킨다. 둘째, 이것들은 창의성과 전통적 예배의 뛰어난 점들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보통 우리를 기운 빠지게 하는 소위 "전통적인"및 "현대적인"예배에 관한 논쟁을 뛰어 넘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가능한 목록을 다 적기에는 지면이 부족하지만, 창의성과 전통이 반대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 몇 가지 예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가. 예배의 준비

첫째, 의식적인 예배의식에의 참여는 준비를 요구한다. 음악회의 경험이 프로그램의 설명을 읽음으로 폭 넓어지고 골프 게임이 연습장에 방문함으로써 도움이 되듯이, 예배에서의 우리의 체험 역시 많은 기도 속의 준비에 의하여 깊어진다. 당신의 교인들에게 개인적인 예배 및 가족의 예배를 위하여 일 주 전 또는 주어진 기독교 달력에서의 시즌의 시작 시기에 간단한 안내서를 나누어주도록 하라. 예를 들면, 주기도문의 첫째 기도에 근거한 예배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안내서 같은 것을 배포하라:

첫째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시편 103

신약낭독 : 갈라디아서 4:1-7, 요한일서 3:1

묵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자녀로서 양자가 되지 않았으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예를 주장하고 나설 수 있겠는가? 보다 더 큰 사랑의 감정이 아버지 안에서보다 다른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이름의 위대한 아름다움은 우리를 모든 불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우리는 감사하지 않고, 반역하며, 외람된 자녀들이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의 긍휼에 맡길 때, 그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모든 아버지 중에서 최선의 아버지시며 가장 친절하신 분이다."- 쟌 칼빈,

찬송 :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

기도 :

"주 하나님, 당신을 참으로 알고, 축복하고, 경배하며, 당신이 하신 일들과 그것들로부터 비쳐 나오는 모든 것들, 즉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 지혜, 친절하심, 공의, 긍휼과 진리로 인하여 당신을 찬양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 등 우리의 모든 삶을 지도하여 우리 때문에 당신의 이름에 욕이 돌아가지 않고 언제나 존귀하게 되고 찬양을 받도록 하소서. 아멘.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예배 드리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예배 전에 이 구절들을 (이 기도를 기도하며, 이 성경 가르침을 읽으며, 이 시편과 찬송을 노래하며) 사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나서 같은 것들을 주일 예배에 사용하라. 이 구절들에 대하여 친숙하게 될 때, 예배하는 사람들은 이 심오한 표현들의 정신과 의미에 보다 완전히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안내서를 준비하는 것은 위압적인 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런 문구들은 목회자가 설교를 연구하는 자료들에서 널리 구할 수 있다. 조금 더 준비를 하면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유익을 줄 수 있게 된다.

나. 성경 낭독

둘째, 성경 낭독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배의 중심적인 행위이다. 성경은 우리가 매주 기쁨과 기대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예배에서 성경의 낭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양한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각각 다른 독자들에게 할당함으로써 함께 성경의 이야기 부분을 읽도록 하는 방법을 고려해보라. 아래의 예는 마태복음 26:47-68에 근거하여 함께 성경을 읽는 간단한 방법이다.

마태복음 26:47-68 (6명의 낭독자)

1.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2.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3.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2.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3.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3.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4.5.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 대제사장이 일어나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2.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6.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4.5.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4.5.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이와 같은 낭독은 연습을 요구한다. 사실 이런 것은 조심스럽게 준비함이 없이는 시도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습이 짐이 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오히려 매우 도움이 되는 교육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마 교회 학교시간에 주어진 구절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예배 시간에 그 구절을 맡아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의 성경 연구는 전체 교인의 예배를 풍요하게 만들 수 있게 된다.

다. 회중 기도

셋째, 매주의 중보 기도를 생각해보자. 종종 이 기도는 "회중 기도," "목회 기도" 또는 "사람들의 기도"라고도 불린다. 이것 또한 조심스러운 준비가 요구되는, 예배의 중요한 순간이다. 예배 인도자 로서의 우리의 목표는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각 방면들을 예배에서의 기도를 위한 하나의 주제로 바꾸기를 추구하는 "중보의 영성"을 양육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두 명의 예배 인도자들을 위한 다음의 중보 기도의 예에서와 같이 세상을 위한 제사장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에 관심을 집중하기 위하여 주간 신문으로부터의 간단한 머리말을 그대로 읽음으로써 중보기도를 소개할 것을 고려해보도록 하라.

(서론): 우리의 기도는 다음의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 국내와 국제적인 관심사를 위한 기도

- 지역사회의 필요를 위한 기도

- 개인적 어려움을 위한 기도

우리의 기도를 구체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각 기도는 지난주의 신문 머리말을 적은 표를 먼저 언급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나라와 세계를 위하여 기도한다.

1: 기사들 : 1995년 9월

- 크로시아에서 서비아와 크로시아가 싸움을 재개했다.

- 공격을 받은 남아공의 사망자 수가 25명에 달하고 있다.

- 위조 비자 사기단이 발견되었다.

- 여행자의 죽음에 관련된 혐의자 두 명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2: 능력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우리는 당신 앞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파괴됨을 인하여 애통합니다.

전쟁의

질병의

불신의

폭력의 세상을 위해

우리는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의지합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세상을 고치시옵 소서(조용히 기도)

1: 우리는 이제 우리 지역사회가 파괴됨을 인하여 기도합니다.

2: 기사들 : 1995년 9월

- 학교의 물품들이 파괴되었다.

- 칼에 찔려 한 사람이 입원하고, 다른 사람이 체포되었다.

1: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

우리의 지역사회도 파괴되었습니다.

우리를 함께 붙들고 있는 기관들이 깨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 삶의 위로가 종종 두려움에 의하여 어지럽혀지곤 합니다.

2: 이제 우리는 개인적인 필요와 파괴됨을 인하여 기도합니다....... (조용히 기도)

1: 기사들 : 1995년 9월

- 외로움 : 아메리카의 가장 큰 살인자

- 두 건의 성적 차별 주장이 추가됨

- 금년 학대받은 아동 수가 증가하다.

- 지역 공장에서 일군의 불만족이 높다.

2: 사랑하는 하나님,

수많은 생명들이 파괴되고 고통에 가득 차 있으며,

실패, 죄책감, 학대의 기억에 시달리며,

의미와 행복을 찾으면서 지루함과 고독의 틀에 박혀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위로 넘치는 임재와, 당신의 고치고 용서하는 당신의 능력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당신이 우리의 세상에서 능력을 일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조용히 기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확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2: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구들이여,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승리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의 말씀은 확실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생명과 우리 영혼의 안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문을 읽거나 저녁 뉴스를 볼 때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한 기도를 준비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의 기도에 참가할 때마다 우리는 신문을 읽고 저녁 뉴스를 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식을 위한 제안은 세상의 형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제안을 고려해보라. 즉, 매주 사람들의 기도에 다른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부터의 기도를 포함시키도록 하라. 점차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각 회원들을 체계적으로 포함시키도록 움직이면서, 중보 기도 안에 둘 또는 셋의 교인들의 직업과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특정한 어려움을 포함하도록 하라. 또는 즉흥적인 기도가 뒤따르며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낭독이 있게 되는 기도를 성경 자체에 근거해서 만들 것을 고려하라.

시편 51편: 죄의 고백으로부터 새롭게 됨과 헌신으로

인도자 1: 시편 51:1-6: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인도자 2: 죄 고백의 기도

인도자 1: 시편 51:7-12: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인도자 2: 새롭게 됨을 위한 기도

인도자 1: 시편 51:13-19: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인도자 2: 헌신의 기도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의 기도를 매주 주일 예배 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만드는데 노력을 투자하라.

4. 성찬

넷째로, 성찬은 경외와 마음으로부터의 기쁨으로 집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찬의 집행에 관한 모든 것은 이 성례가 하나님으로부터의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임을 전달해야 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찬에서 사용되는 말에 반영되어야 한다. 아래에서의 예배 중 사용하는 구절(1994년 CRC 총회에서 받아들여진 구문으로부터 인용)은 초대 교회의 성찬에서 사용되던 감사의 기도 양식을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친숙한 구절들과 고대 찬양의 노래인 "거룩, 거룩, 거룩"과 칼빈의 신학에 매우 영향을 끼친 고대의 용어("너의 마음을 주님께로 높이 올려라") 등을 합친 것이다.

성찬의 가르침

이 말들로 우리 주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참된 믿음과 그의 영광 중의 재림에 대한 담대한 소망 중에

이 떼어진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 성찬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끝내신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성령께서 우리를 지금 천국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연합 시켰음을 선포하십니다.

감사

목사 :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들어올리십시오.

회중 :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들어올립니다.

목사 : 주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회중 : 우리가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목사 :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는 기쁨으로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우리가 죄에 빠졌을 때에도

우리와의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성도와 천사와 온 피조물과 함께 우리의 목소리를 합하여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다함께: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성찬의 제정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께서 고난 당하기 전에 그가 다시 올 때까지 우리에게 그의 희생을 기념하도록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의 마지막 저녁에서 주 예수께서는 떡을 취하여 감사를 드린 후 그것을 떼고서(여기서 목사는 떡을 뗀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