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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

  1. 모든 예배를 계획하는 사람들과 인도자들은 목회자적인 소명이 있다.

대부분의 우리는 "개혁교회의 예배"(Reformed Worship)를 아마도 실용적인 이유에서 읽을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료나 노래, 성경 본문, 문구, 그리고 그림들을 찾기 원한다. 가능하면 다음주까지.

그러나 우리는 또한 보다 깊은, 기술 이상의 것을 찾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떠한 관점, 즉 우리가 교회에서 매일 매일 해나가는 일 가운데 우리를 붙들어줄, 예배 인도자로서의 우리의 역할을 관념화 하는 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싸움에 지친 리더들에게 특별히 맞는 말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지치고, 매 주 예배의 완전한 내용을 만들어 내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이다. 다른 사람들은 "예배를 위한 싸움"이라는 말들이 우리의 일로부터 기쁨을 빼앗아 가는 교회에서 일하는 것에 지쳐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노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거나,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는 불가능 할만큼 높은 기대를 가지면서도 자기 자신들에게는 놀랍게도 적은 기대를 가지고 오는 교회에서 지침이 없이 일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에게는 기술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를 격려하고, 지탱해주고, 힘을 줄 비전이 필요한 것이다.

  1. 변화하는 예배 인도자의 역할

지난 몇 십 년 동안 많은 책들이 교회에서의 변화하는 목회자의 역할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어 왔는데, 이러한 책들은 목회자와 그들의 교회들이 목회자의 역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중심적인 생각을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목회자는 교회에 머물고 있는 신학자인가? 전문기술이 있는 웅변가인가? 영적 치료자인가? 아니면 교회의 경영자인가? 하고 말이다.

한 교회와 거기 있는 목회자가 이러한 목회자의 신분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따라 크나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한 목회자가 서로 경쟁하는 목표 중에서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 어떻게 교회가 그 자신의 사명을 생각하는가, 어떻게 새로운 목회자를 찾는가, 그리고 어떻게 신학교의 교과과정이 정해져야 하는가 등 모두를 바꾸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배를 계획하는 사람과 인도자로서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역할에 대한 특정한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일을 해나가는가, 즉 어떤 집회에 참석하고, 어떤 정기간행물을 구독하고, 위원회 모임에서 무엇을 하며,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등을 결정하게 된다.

지난 10년 동안 필자는 국내 전역에 있는 여러 개 교단에 속한 교회의 예배 인도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필자는 종종 각종 리더들에게 자신들의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물었는데, 그들의 대답은 거의 언제나 아래에 기술된 범위 내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1. 네 가지의 자아상

a. 숙련가(Craftspeople)

우리는 설득력 있는 설명과 적절한 비유를 가지고 말들이 생명력이 있게끔 글을 쓰거나 설교를 한다. 또는 정확하게 맞는 재료, 그림, 또는 색깔을 발견하여 성찬기나 현수막 등을 만들 수도 있다. 또는 글귀의 뉘앙스와 기억될만한 곡조와 아름다운 조화 등을 따라서 음악을 만들기도 한다. 또는 기도문을 쓰든지, 연극 대사나 새로운 찬송이나 노래를 쓴다. 예술가 페루지노 (Perugino), 음악가 팔레스트리나 (Palestrina), 설교가 단 (John Donne), 찬송작가 왓츠 (Isaac Watts), 그리고 수세기 동안의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우리는 숙련가이다.

b. 관리자와 연출자(Directors and Coordinators)

우리는 "음악 담당자"또는 "예배 연출자"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람을 선발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우리는 또한 연습을 하기도 하며, 거의 모든 모임마다 우리에게는 지정된 자리가 있다. 우리는 예배 순서를 교정하며, 물건들을 평가하고 구입한다. 우리는 성경낭독자와 악기 연주자 및 음향을 위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여러 군데 전화를 건다. 최근에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 말했듯이 "이 예배의 일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 되었다.

c. 공연자(Performer)

싫어하면서라도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공연자로 보고 있다. 우리가 올갠을 연주하든지, 연극에 참여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우리의 일에는 공연의 측면이 있다. 우리나 우리 교회가 이 명칭에 제 아무리 항의를 한다 할지라도, 곡조를 만들어내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말하고, 멋진 현수막을 만드는 일등이 우리에게서 기대되고 있다. 예배 후에 우리는 종종 "인상적인 음악"또는 "잘된 연주" 또는 "힘있는 설교" 라는 말을 듣는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말을 하도록 예배를 만드는 일에 우리의 힘을 쏟는다.

d. 영적인 기술자(Spiritual Engineer)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보다 나은 용어가 없어서 사용하게 되는) "영적인 기술자"로 본다. 우리가 가진 우선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 능력으로 가득 찬 순간들을 창조하기 원한다. 얼마 전에 필자는 어떤 목회자로부터 예배 인도자를 찾는 일에 대한 조언을 전화로 부탁 받았다. 나는 그 때 "어떤 면을 추구하십니까?" 라고 물었는데, 이에 대한 답은 (그 의미가 결코 단순하지 않은 표현인)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 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표현들이 예배 인도자를 찾는 광고란에 점점 더 나타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창의력, 개인 간증, 그리고 카리스마적인 개성을 가지고 평범한 시간을 거룩한 순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

  1. 보다 나은 모습

이 네 가지의 이미지는 흔한 것이지만, 이 중 아무 것도 우리의 일에 충분한 것은 없다.

a. 우리가 가진 재주는 중요하지만, 교회는 연극이나 시 또는 음악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연출능력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알았다. 그가 한번은 예배 인도자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책망한 적이 있다:

"우리는 교회를 설립하고, 건물을 짓고, 노래하고, 종을 울리고, 옷을 입고, 향을 피우고, 기타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위한 모든 추가적인 준비를 하면서 이러한 준비 자체가 실체요, 주된 예배라고 생각하고 달리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집을 짓기 원해서 발판을 세우는 일에 모든 재산을 사용해버려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정작 그의 집을 위해서는 돌 하나도 쌓지 못하는 사람과도 같이 지혜롭게 행동하고 있다."

우리의 "공연"은 아마도 필연적인 것이겠지만, 이것도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자아상은 그 대상이 시카고 교향악단이나 그랜트(Amy Grant)든 간에 우리가 하는 사역의 결과를 연주 장소에서의 즐거움과 구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멋진 것" 또는 "기막힌 연주" 또는 "인상적인 설교"라고 말하는 것과 "무어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오늘 저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앞에서의 숙련가, 연출자 및 공연자의 이미지는 실제만큼 높은 것이 아니라서 불완전하지만, 네 번째의 이미지, 즉 영적 기술자의 이미지는 우리 자신의 사역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므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거룩한 순간에 참여하고자 하는 관심사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제아무리 카리스마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창의력과 재주로 거룩한 순간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시도한 사람들의 잘못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갈멜산에서의 바알의 선지자들이나 언약궤가 전달되어 왔을 때 붙들려고 했던 종들을 생각해보라. 루터 대학(Luther College)의 예배실과 음악관 봉헌식에서 노벨(Westin Nobel)은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전에 계시지 않는다" 라는, 즉 하나님의 임재는 선물로서 받아들여져야 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바울 서신의 한 구절에 근거한 찬송을 선택했다. 그것은 기술적으로 조작되거나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역할을 그린 이 네 개의 모습은 완전하지 않다.

목회자적인 이미지를 향하여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문맥 속에 넣고 그 과장을 교정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우리의 신분을 밝혀줄 또 하나의, 보다 강한 이미지가 필요하다. 즉, 우리는 예배의 계획과 인도를 목회자적인 직무로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중에 불과 몇 명만 사역의 직함으로 "목회자"(pastor)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목회자와 같은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우리는 "사도들의 율례" (Constitutions of the Holy Apostles)라는 이름의 4세기 문서의 충고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는 사람, 변화시키는 사람, 가르치기를 잘하며, 악을 참아내고, 부드러운 마음, 온유하고, 오래 참고, 격려와 위로를 잘 하는 사람이 되라." 그리고 나서야 이 고대 교회문서는 비로소 기술적인 면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교회의 모임이 있게 될 때, 당신은 마치 큰 배의 사령관과도 같다. 집사들로 하여금 마치 선원같이 모든 적절한 관심과 품위로써 교인들을 위한 장소를 준비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가능한 기술을 동원해서 일이 되게 하라." 우리의 일에서의 기술과 조정과 "공연"은 우리가 목회자적인 심정으로 접근할 때만이 그 궁극적인 목표와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교인들을 따스하게 환영하는 행위에서 그 목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예배 인도자들로서 우리는 사람들의 입술에 기도의 말을 놓는 중요하고도 무서운 직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노래를 선택하던지 응답을 기록하던지 매 번 일어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청지기가 되는 거룩한 직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성경낭독과 예배 주제의 선택은 사람들이 취하는 영적 양식, 즉 그들이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먹는가에 대한 우리의 영향의 정도를 나타낸다. 이런 거룩한 직무들을 위하여 교회는 숙련가, 연출자 및 공연자 이상이 필요하며, "영적 기술자"가 되려는 어떠한 교만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회는 교회의 예배를 계획하고 그것을 인도하기 위하여 목회자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자"로서의 우리의 역할은 결코 다른 역할의 측면을 없애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명확하고 조리 있는 연설자, 기술적으로 능숙한 음악가, 독창적인 예술가로서의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관리자요, 회의를 소집하고, 연습을 하고, 교정을 한다. 우리가 영적 기술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두려워하고 떨면서)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사람들의 영혼 깊이 울려 퍼지며 따라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그들을 이끌기 위하여 그들의 입술에 기도의 말씀을 놓는 제사장 직무의 일부를 맡는 것이다.

목회자적인 예배 인도자의 모습

필자는 예배의 계획과 인도에 목회자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몇 가지를 발견했다.

a. 배움에 대한 사랑

첫째, 그들은 분별하는 마음의 은사를 개발하는 사람들로서, 성경에 대한 깊고도 자라나는 지식을 가지며, 그리스도인의 복음 진리를 사랑하며, 가장 깊은 질문들을 살펴보기 원한다. 그들은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좋은 의도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회자적인 감각을 연마하기 위하여 책과 정기 간행물을 읽고, 과목을 택하며, 모임에 참석한다. 그들은 예배를 의미 있게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이 기독교의 복음을 심오하고 바로 나타내는 것에 있음을 알고 있다.

목회자적인 리더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 예배의 "시편, 찬송, 그리고 신령한 노래들"이 불려졌는가 라고 계속해서 질문한다. 그들은 그들 교회에서의 예배가 하나님을 무관심하고 동떨어진 것으로 묘사했는지, 기도가 단순히 머리 속의 행위 아니면 반대로 순전히 감정의 행위라는 인상을 주었는지, 그들 교회의 예배가 교회의 삶과 신앙에 성경이 중심적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는지 등의 신학과 예배의 연결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예배가 공동체의 가장 깊은 신학적 확신을 표현하며, 그것이 교리문답 또는 신앙고백만큼이나 공동체의 믿는 바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화란 신학자 리우(Gerardus van der Leeuw)가 "신학이라는 손 전체가 즉각적으로 관여됨이 없이 예배라는 손가락만을 두드릴 수는 없다"(=예배의 어느 부분도 신학 전반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말했을 때 의미했던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성향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좋은 것과 나쁜 것, 보다 나은 것과 보다 나쁜 것들을 의식적으로 선택한다. 그들은 부정확하고, 극단적으로 단순하거나 감상적인 대본, 설명, 또는 그림이나 노래를 거절하고자 한다. 그들은 복음적 열정과 개인적인 과장, 영적으로 민감한 미적 비평과 단순히 잘난 체 하는 태도, 시장성에 대한 굴복과 수 년 동안의 침체되고 평범한 신앙생활 후에 있게 된 영적으로 새로운 기운의 바람 등을 본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가진 분별하는 마음의 본질이다.

b. 목회자적인 마음

두 번째로, 그들은 목회자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인들의 이름, 얼굴 및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들은 방문자들을 알아보고 환영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성경 낭독이나 악기 연주나 음향 조절을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를 안다. 그들은 누가 필요한 기술을 가졌으며, 누구에게 그러한 참여가 의미 있는 봉사의 행위가 되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기도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에 그들을 돌볼 수 있다. 필자가 아는 한 성가대 지휘자는 연습 전에 성가대원 각자를 위해서 기도한다. 따라서 성가대 연습은 기쁨 없이 곡조만을 배우는 연습에서 목회적으로 돌보는 의미 깊은 기회로 변화했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이 사람들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기도로 인도해야 할 줄을 아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음악이 즐거웠다" 또는 "그건 멋진 노래다" 라고 하기보다는 "그 노래를 통하여 나는 나의 죄를 주님께 고백했다"든지 "그 노래를 통해서 나는 하나님을 보다 진실하게 찬양할 수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게끔 가사와 노래를 선정한다.

c. 기쁨의 정신

셋째로, 목회자적인 예배 인도자들은 기쁨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20세기 독일의 신학자 구알디니 (Romano Guardini)는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예배는 어린이의 놀이나 예술의 삶과 공통적인 것이 있다. 어린이의 놀이는 목적이 없으나 심오한 의미로 가득 차있다. 예배는 일이 아니라 놀이다. 이것으로부터 의미 깊은 성실함과 하늘의 충만한 기쁨이 고귀하게 섞인 것이 도출되는 것이다." 교회의 예배 인도자와 계획하는 자로 봉사하는 것은 놀이터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즐거운 발견할 거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는 배워야 할 사람들, 살펴야 할 새로운 아이디어들, 발전시켜야 할 창의적인 은사들이 있다.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찬송가나 새로운 음향시스템이나 개정된 기도서나 출판된 또 다른 대본 전집이 아니다.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예배를 계획하는 사람과 인도자로서의 자신의 일을 거룩하고 목회자적인 소명으로 취급하는 분별력 있고, 기도로 충만하고, 기쁨이 있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