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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의 갱신으로서의 예배
언약이란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성경적인 비전이다.
? 차일즈(Brevard Childs)는 "신명기의 언약형성 배면에 있는 시대나 상황에 관계없이 언약신학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식이며, 히브리 성경 전체를 총망라하여 연결시키는 신학적인 범주"라고 말한다.
? 멘덴홀(George Mendenhall)과 헤리온(Gary Herion)은 Anchor Bible Dictionary 최신 판에서 "'언약'이란 개념은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중심적인 비유이다" 라고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 언약과 예배의식(행사로서의 예배)과의 관계
가. 언약갱신의 예배와 의식
언약은 일정의식을 통한 인준에 의하여 효력을 발생한다. 가장 흔한 언약인준의 형태는 볼처(Klauser Baltzer)에 의해 가장 완벽하게 설명되었는데, 이러한 인준의식에 공통된 여섯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언약 당사자들이 가졌던 이전 관계의 (역사적인) 서술, 의도하는 장래 관계의 요약, 그 관계의 자세한 내용들, 신들로 하여금 이 언약의 증인이 되어주기를 원하는 초청, 그리고 저주와 축복의 선언. 그리고 이러한 언약의 선포 후에는 보통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의식이 따른다 (창 31:54, 출24). 또한 언약은 언약인준 절차에 흡사한 의식절차를 따라 자주 갱신되어진다.
(예) 출34, 신31:9-13; 수24; 왕하23; 대하15; 느9-10; 스9-10
나. 서약(Vow)이라는 말의 다른 용도
시22:25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시56:12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시66:13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시116: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다. 관계의 실천, 대화의 줄거리로서의 시편 찬송
시편 자체는 흔히 대화의 기록으로서,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께로 향한 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또한 말씀의 선포,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탄원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이 교대로 반복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편 12편은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 지도소이다" 라고 시작하지만, 그것은 곧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으로 대치된다. 이러한 대칭적인 구조는 토르니(Raymond Jacques Tournay)가 "성전에서의 예언적 예배의식"이라고 불렀던 내용을 나타낸다. 따라서 시편은 부르게만(Walter Brueggemann)이 말 한대로 "성경적 신앙이라는 것은 철저히, 그리고 온전히 대화적인 것이다" 라는 진리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또한 신명기의 역사에 뚜렷하게 나타나며, 신구약 전체의 상당한 부분에 걸쳐 나타나는 언약의 상호 대응성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예 중에서 시편 81편을 살펴보자.
우리 능력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찌어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
이르시되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뇌성의 은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라. 주의 만찬에 나타난 서술문
놀랍게도 신약에서 주의 만찬에 관하여 언급되어있는 부분들도 언약의 개념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은 "내 피로 맺은 새 언약"(눅22:20, 고전11:25)에 관해 언급하면서 예레미야에서 예언된 내용인, 주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맺으실 "새 언약"(렘31:31)에 관해 주의를 환기시켜 주고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초기 문서인 누가복음 및 바울서신과는 다르게 예수님이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마26:28; 막14:24)에 대해 말씀 하심으로써 출애굽기 24장의 언약의 피(출24:8)와 함께 언급된 언약 인준 예식과 메시아 예언(슥9:11)을 우리에게 상기 시켜 주신다.
언약의 의미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예배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새 언약을 갱신하는 것이다.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언약적 관계를 누리는 것이다.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가지는 결혼 서약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가지는 대화이다.
이러한 예배의 본질은 현대의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해와는 잘 맞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어떤 행사에 갈 때에는 다음과 같은 기대를 가지고 간다.
? 즐기기 위해서 (스포츠 경기 관람)
? 영감을 얻고 격려 받기 위해서 (교회 음악회 등)
? 배우기 위해서 (강의나 강좌)
? 공동체를 체험하기 위해서 (잔치나 potluck dinner)
? 관심과 사랑을 표명하기 위해서 (친구의 결혼식)
그러나 예배는 위의 어떤 범주와도 맞지 않는다. 예배는 이 모든 것보다 훨씬 심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예배를 위의 한 범주 속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아마도 우리가 서원을 하기 위해 어떤 행사에 가는 경우는 일생동안 단 한번 (결혼식 때)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야말로 우리가 예배에서 하는 일들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감화를 받고,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공동체를 체험하고 하는 등의 일들은 예배의 부산물일 따름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들이 예배의 주목적이 되어질 때, 모든 것은 뒤죽박죽이 되어갈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목회상의 도전은 예배를 기술적으로 인도하는 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예배의 풍성함과, 깊고 심오함 등...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 모두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하는 일이다. 실로 이러한 예배야말로 우리가 가진 인생 최고 최대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 "예배"라는 단어의 세 가지 의미
예배라는 단어는 다음 세 가지의 뜻을 지닌다.
(1) 영적 예배
우리는 우리의 일, 휴식, 가정과 모든 삶의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있다. 우리의 모든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물이다. 이것이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말하는 예배의 의미이다.
(2) 예배 의식 (공중 예배)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예배" 라고 하는 예배의식, 절차, 행사를 위해 정기적으로 모인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4장 20절에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라고 말할 때의 의미이다. 이것은 예배의식(liturgy라는 말로서 이 말은 단순히 예배 시 송영 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주일 대 예배에 왔을 때 행하는 모든 일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예배의식은 전통적인 교회이든, 비전통적인 교회이든, 그 의식절차가 문서화되었던 안 되었던지 간에 어떠한 교회에도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다.
(3) 찬양과 경배
우리는 또한 찬양과 경배도 예배라고 부른다. 이것은 시편 95편 6절에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이 좁은 의미의 개념은 영어 고어 "weorthship"에서 나온 것으로서 "가치를 누구에게 돌린다" 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칭찬할 때 우리는 어떤 가치를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자연적인 반응은 그를 찬양하고 경배하며 그에게 가치를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공식 예배 중에서도 하지만 다른 상황에서도 행한다. (가령 예를 들면 아기가 태어난 것을 보거나 아름다운 경관을 볼 때에 자연스럽게 찬양이 나오는 것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배"의 의미들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해서 생각할 수 있다.
경배와 찬양
예배 의식
영적 예배
그러나 이 단어가 가진 의미를 주어진 상황에 잘못 적용될 때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어떤 때는 우리가 예배의식(두 번째 의미의 예배)에만 치중함으로써 우리 삶의 전반에서 드려야 하는 영적 예배(가장 넓은 의미의 예배)를 소홀히 하게 될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 개혁장로 교인들은 다른 교단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잘 지적해왔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가 표방하는 주된 강조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개혁 장로교 교인들에게도 허점은 있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예배 드려야 함을 강조하다가 예배의식(공중 예배)의 중요성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대학 내에 예배당을 짓는 일에 입을 다문다든지, 신학교에서 예배의식에 관계된 과목에 대해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해 왔다. 심지어 예배의식 중에도 설교 이전의 모든 절차를 "서론"정도로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두 번째 의미의 예배에 대한 관심부족과 함께 넓은 의미의 예배(영적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 (예배의식)가 상호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한 편이 강해지면 다른 편도 강해지게 되는 것으로, 우리가 삶 모든 분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예배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최근에 이 예배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겨나는 문제들을 많이 보게 된다.
마치 개혁교회가 예배의 주목적이 설교에만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찬양과 경배를 너무 중요시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것이 마치 예배의 전체인 양 생각하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즉 찬양 팀의 마이크가 강단의 위치를 차지해 버린 모습이라든지, 찬양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다른 예배의식, 즉 죄 고백의 기도나 탄원, 교리암송이나 간증의 시간이 없어지는 경우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 인도자가 "이제 예배시간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는 말씀공부 시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듣게 된다. 물론 찬양이 중요하고 찬양은 구원 받은 자의 마땅히 행해야 할 바이지만, 그것이 예배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위의 내용에서 본 바와 같이 언약에 근거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갖는 다양한 대화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예배"라는 단어가 가지는 이러한 차이점을 인식하고 실행함으로써, 그 단어가 가지는 전체의 의미를 실현하고 누리는 예배를 행해야 할 것이다.
- 예배에 관한 설교
서문
예배에 관해서 설교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본문을 사용해야 하는가?
이 일을 계획할 때 우리가 부닥치게 되는 문제는 성경 본문 중에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부분이 극히 적다는 사실이다. 구약에서는 예배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과 명령들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예배의식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명시된 규범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예배에 관련된 구절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 구약에서의 예배의식
이 절차들은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사실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예를 들면 거룩함 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갖추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중심 된 특성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 다양성
구약에서 나타나는 언약갱신의 절차(수24), 신약의 세례식(행8, 10), 설교, 예배 등에서 우리는 다양한 예배의 형태를 본다.
?? 예배의식과 송영의 예
구약 시편, 찬송가, 기도문(대상16, 느9), 신약의 찬송과 기도(눅1, 빌2, 계5,7, 행4)
?? 경고
잘못된 예배에 대한 질책(사1). 여기서는 미신, 우상숭배, 위선 등의 세 가지 죄에 대하여 신랄히 비난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현대 교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 예배에 대한 지침
신약에서 예배의식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야 한다는 것과 예배는 신령(영)과 진정(진리)으로 드려야 한다는 명령이 나온다(고전14, 요4).
위와 같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예를 통해 우리는 예배에 관하여 일률적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사실을 통해서 성경에서의 가르침과 실제 여러 형태의 예배사이에 깊은 관계와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예배는 마치 다이아몬드와 같은 것이어서, 어느 한 면만 보고 그 색깔과 모양을 규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예배가 이와 같이 다양하고 넓은 이유는 그것이 목적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예배의식 자체를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고 풍요롭게 하며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모이는 것이다. 결혼예식이 새로이 세워지는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 행해지는 것처럼, 예배의식도 주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가진 관계를 표현하고, 깊게 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관한 설교는 의식절차와 인도방법에 대한 것이기보다 하나님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특정한 의식 절차들이 우리가 하나님과 갖고있는 이 놀라운 관계를 얼마나 잘 나타내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 언약갱신으로서의 예배
아래에서는 예배에 관한 네 부분의 시리즈를 통하여 언약갱신에서의 네 가지 방면들을 살피고자 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심적인 초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는 새로운 언약 관계에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어떻게 예배가 이러한 관계를 표현하고, 깊게 만들고, 형성하는가에 있게 된다.
제 1 주 : 언약관계를 실현하며 표현하는 예배
우리는 예배에 모여 하나님과 대화한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하나님께 응답한다. 이는 마치 인간사이에 대화하며, 약속을 주고받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대화에 있어서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이 일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성경본문
?? 시편81- 한 사람이 1-5절(예배의 부름)을 읽고, 다른 사람이 6-16절(하나님 음성)을 읽는다.
1부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향한 찬송과 고백, 2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한 설교가 연결되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대화적인 관계로 나타내고 있다. 이와 유사한 본문은 시12,60,89,108, 사6,45,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히브리서 8-10, (특히 히10:19-25와 렘31:31-34). 한 사람이 히9:1-10(구 언약의 예배)을 읽고, 다른 사람이 히9:11-14,10:19-25(새 언약)를 읽는다. 여기서는 구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면서 각 언약에 합당한 예배의식에 관해서 말한다.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예배가 가능케 된 사실을 예배자가 인식하며 담대히 하나님께 나간다. 우리의 찬양, 고백, 탄원, 그리고 하나님 임재의 체험은 우리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주된 주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서 이 모든 대화의 중재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중심사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언약관계를 가지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예배는 이 사실을 표현하고 누리는 것이다.
관련된 주제
??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다.
??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선함이나 장점 때문에 누리는 것이 아니다.
??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리를 놓으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 이 관계는 예배를 통해 실현되고, 누려지고, "글로 기록되고," 표현되고, 초점이 모아진다.
?? 예배가 언약의 교환과 확인이라면,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은 미신적인 것이며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가능해진 관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누리기 위한 것이다.
예배의 의미와 예배의식의 근거
여기에서 큰 질문은 대부분의 우리가 예배를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의 교환으로 체험 하는가, 아니면 종교적인 사회 모임이나 교육 토론회 또는 일종의 오락의 형태로 체험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른 종류의 행사들이 우리의 문화 속에 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모임에 대한 기대를 예배 속으로 들여오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교인들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피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우리는 예배가 심오한 참여와 관계의 행위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듣는 자요, 말하는 자요, 약속을 받는 자요, 또한 약속을 주는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예배는 언약의 교환의식 이므로 교인들로 하여금 듣는 자, 말하는 자, 언약을 주고받는 자로서 참여하고 관계적인 의무들을 수행할 것을 강조해야 한다. 모임의 성격은 대개의 경우 어떻게 시작하는가에 의하여 결정되므로, 우리는 예배시작부터 이러한 도전을 주어야 한다. 예배의 시작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를 열게 됨으로써 시작된다. 전통적인 방법은 성경말씀에서 가르치는 예배에로의 부름으로 시작해서 모든 교인들로 부터의 응답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로써 이 후 행해질 모든 의식절차의 틀이 잡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 예배를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있는 언약관계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고려하고, 또 예배가 그러한 관계에 근거해서 드려지는 것이라고 할 때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과의 대화임을 우리는 처음부터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제 2 주 : 언약관계에 있어서 정직함
관계란 서로간의 정직한 의사표현에 달려있다. 결혼과 같은 깊은 언약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이다. 잘못은 인정하고, 문제점들은 토의되어야 한다. 죄는 고백하고 뿌리를 뽑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은 예배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정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편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성경본문
?? 시편89. 각 사람이 본문의 각 단락 (1-2,3-4,5-18,19-37,38-45,46-48,49-52) 또는 그 첫 절들을 읽는다. 시편 81편처럼 이 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를 보여준다. 이 시편은 찬양으로 시작해서 애가로 끝을 맺는데 언약관계에서 확인된 하나님의 신실 하심으로 인해 기자는 담대히 자신의 비탄을 아뢴다(시44편을 참조).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유일한 희망을 거는 것이다.
?? 느헤미야9. 한 사람이 서술부(1-5절)를 읽고 다른 사람이 에스라의 말(6절 이하)을 읽는다.
전체 장을 읽든지 1-15절과 26-37절만 읽을 수도 있다. 5-31절은 기도 중간에 나타난 역사 이야기이다. 언약역사를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비로 역사하신대로 다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고백기도의 예로서는 에9, 단9, 느1:5-22가 있는데 모두 언약관계를 주장함으로써 시작한다).
?? 히브리서4:14-16. 이 본문은 우리에게 새 언약에 있어서의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신 일 때문에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담대히 기도할 수 있다. 우리와 관계없는 이유든 우리의 죄로 인해서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의 권세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중심사상
언약관계는 우리의 정직함을 요구한다. 정직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세상의 죄성을 인정하며 가슴 아파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내면의 태도와 외면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관련된 주제
?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투명성을 가지는데 대한 장애물에 관하여 변명을 늘어 놓아서는 안 된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 기도의 중보자이므로 우리는 담대하고 정직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
?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신실함에 근거하여 감사로 죄의 고백과 탄원 및 중보기도를 드린다.
예배의 의미와 예배의식의 근거
전통적인 예배는 죄의 고백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임을 감안하여 그것을 예배순서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순서는 보통 (하나님으로부터의)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언약관계에 있어서 정직할 것을 요청하고, 도전하고, 또한 명령한다. 그 다음에는 (인간으로부터) 개인과 전체 회중의 죄를 고백하는 순서를 갖는다. 그 후에는 다시금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는 언약의 말씀을 듣는다.
제 3 주 :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들음
예배는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어서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찬양과 기도로 예배를 드리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되고, 그 분께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어왔다. 현대 지성인들은 설교가 다른 강의나 연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설교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요 마침이 되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본문
?? 여호수아24. 시작 부분과 여호수아가 말하는 부분을 두 사람이 읽고, 백성 부분을 회중이 읽게 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얻을 뿐 아니라 언약관계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초기의 예배의식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레위기에 나오는 희생제사와는 달리 이것은 언약갱신을 위한 예배의식이다(수8:30-35참조). 이 예배의식 가운데 여호수아는 설교를 통해 역사 중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이를 근거로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로이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여호와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뀌며("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이끌어내어"), 하나님께서 직접 언약갱신을 촉구하신다.
?? 데살로니가전서 2:13.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 요한 1서4:1-6. 설교자는 새 언약, 즉 복음만을 설교해야 한다.
중심사상
우리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만 근거하여야 한다. 이 관계에 있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그의 말씀을 적극적인 기대를 가지고 듣는 것이다. 그 말씀이야말로 가장 좋고, 지혜롭고, 참된데 왜 그렇게 안 하겠는가?
관련된 주제
? 우리가 교회를 나오는 것은 우리보다 더 큰 절대자에게 복종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다.
? 설교는 언약관계의 확인절차로서 일반적으로 성경지식을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관계에 관한 내용으로서 우리를 위로하고, 도전하고, 경고하고, 축복하는 것이다.
? 우리는 예배 중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봉독, 설교, 인사, 축도 등 여러 형태로 듣게 된다.
? 예배가 성경에 근거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하시는 일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우상숭배로 빠질 수 있다.
예배의 의미와 예배의식의 근거
전통적으로 기독교 예배의 중심은 성경봉독과 그에 근거한 설교에 두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중에 성경 말씀의 충분한 양을 읽고, 그것을 설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봉독은 설교 전에 행하는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언약관계에 있어 중요한 절차라는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개혁 장로교회를 포함한 많은 교회에서는 성경을 봉독하기 전 기도 하는 순서를 갖고 성령께서 성경봉독과 설교(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에게 밝히 알려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한다. 이것은 설교가 인간의 재능이나 언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제 4 주 : 언약관계를 확인함
언약관계를 확인하기 위하여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을 사용해 왔다. 결혼예식에서 반지를 사용하듯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의식을 사용한다. 이 관계는 세례식으로 시작하여 이후에도 자주 성찬식을 통하여 확인되어진다. 이러한 눈에 보이는 의식을 통하여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순히 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어 영향을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이 일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게 된다.
성경본문
? 출애굽기 24. 다른 사람들로 배역을 맡아 읽게 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본문의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장면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성찬식의 그림자라고 생각되어졌다. 이것은 언약 후 먹고 마시는 장면을 연상시키며(창26:30, 31:54), 하나님과 사람의 교제를 상징한다.
? 고린도전서11:17-33. 여기서 잔은 예레미야 31:31-34와 히브리서 8-9에서 말하는 "내 피의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이 잔과 떡을 취하는데 도덕적인 경고가 따르는 것은 언약 당사자의 책임과 신실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성찬식은 기억하기 위함이요, 선포하는 것이요, 감사하는 것이요, 기대하는 것이며, 언약의 모든 요소를 망라하는 것이다.
중심사상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례라는 구체적이고, 실체적이고, 현실적인 행동에 의해 확인되고 체결되 는 것이다. 성례는 이러한 깊은 관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데서만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관련된 주제
? 성례는 이 언약관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 예식을 통해 우리는 우 리의 사랑을 표현하고, 언약 당사자로서 필요한 확인을 얻게 된다.
? 따라서 성례는 우리와 하나님과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 은 아니다.
? 성례는 물질(물, 포도주, 빵)을 사용하며, 이러한 물질 때문에 그 의미가 나타나게 된다. 성령께 서는 이러한 물질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우리의 행위를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확증하고 유효하게 하는 것이다.
예배의 의미와 예배의식의 근거
기독교 예배에서 전통적으로 성찬식은 찬양, 죄의 고백, 그리고 말씀선포 후에 행해진다. 이것은 교회가 성례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보다 깊은 것, 보다 앞선 것에 대한 보증으로서 보았음을 의미한다. 성례는 선포된 복음과 이루어진 모든 관계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식에는 구원역사의 모든 과정을 상기하는 감격적인 감사의 기도 순서가 있는데, 현대의 감각으로 보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오래된 언약기도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시105, 대상16 참조)
- 예배에서의 기도
1. 효과적인 제사장적인 기도는 기도의 삶으로부터 생기게 된다.
2.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기도라 할지라도 교인 모두를 기도로 인도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부터, 다른 문화로부터, 다른 역사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시편이나 공중 예배서(The Book of Common Worship)와 같은 고전적인 자료를 이용함으로써 기도를 준비하라. 그러나 사용하는 용어는 개인적인 것으로 함으로써 기도가 당신의 상황에 맞는 것이 되도록 하고, 당신의 교인들이 가진 특정한 필요와 관심사를 언급하도록 하라. 이렇게 하는 것은 (예배서의) 증명된 용어가 갖는 힘과 아울러 당신 교인들과의 직접적인 연관을 얻도록 해준다.
3. 언어는 음악과 같이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아들여지고 발전되어져야 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예배 때에 진부한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예술과도 같이 언어는 창조성, 상상력, 그리고 깊은 생각을 요구한다. 당신의 기도를 글로 적음으로써 기도를 인도하도록 준비하라. 즉흥적이거나 자발적인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문구와 표현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의 선교사님들과, 우리의 친구들과, 우리의 가족들과 함께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를 글로 적어보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관하여 생각하도록 만들며, 따라서 너무 자주 사용함으로써 의미가 거의 없는 말을 피하도록 만든다. 혹시 적은 내용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훈련은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게끔 당신을 자극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즉흥적인 기도의 힘이나 즉각적인 기도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4. 교회의 기도 생활은 찬양, 고백, 감사, 그리고 죄에 대한 슬퍼함 등을 균형 있게 취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교인들에 대한 광고나 설교로 연장되는 내용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
5. 교회의 중보 기도생활은 개인적인 것, 교인들에 관한 것,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사에 관하여 골고루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교인들의 기도에서 우리는 세계의 필요를 위하여, 즉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의 기도를 대신하여 하기도 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매우 편협하고 자기 중심적인 기도를 하면서 보다 큰 문제들이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게 되는데, 연합 예배는 이러한 경향을 치료할 수 있는 시기이다.
6. 대중 기도는 사적인 언어(1인칭 단수)가 아니라 대중적인 언어(1인칭 복수)를 사용해야 하며, 공동체 전체의 관심사를 모두 포함시켜야 한다.
7. 기도는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상상력이 동원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당신의 기도에 단순히 추상적인 언어보다는 생생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하라. 예를 들면 "주 하나님, 당신은 위대하시고 사랑이 많으십니다" 라고 하는 것보다는 "주 하나님이 당신의 가장 높은 산보다도 크시고, 가장 진실한 친구보다도 더 우리를 관심 있게 돌보십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도록 하라. 생생한 표현은 예배를 드리는 자의 상상력을 증진시켜서 "자동적으로 드려지는 예배"에서 벗어나도록 우리를 돕는다.
8. 예배의식에서의 기도는 익숙한 언어와 그 때 그 때 새롭게 사용하는 언어와 균형을 이뤄야 한다. 즉각적인 기도, 미리 글로 쓴 기도, 그리고 성경에서 나온 기도가 균형을 이루도록 하라. 즉각적인 기도는 예배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가치가 있다. 미리 글로 쓰는 기도는 예배를 계획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단한 시와 같이 특별히 아름답고 적합한 기도를 문서화할 시간을 허락해준다. 시편이나 주기도문을 포함한 성경적인 기도는 잘 알려지고 심지어 암송된 단어들을 사용하는 가치가 있다. 이러한 기도들은 각각 가치가 있는 것들이며, 따라서 이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도록 하라.
9. 우리의 기도는 성경에서 나온 기도(시편 또는 주기도문)를 (단순히 설교의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기도로써 사용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10. 예배의식에서 사용되는 많은 음악들은 기도이다. 우리는 교인들로 하여금 이러한 음악들을 그렇게 경험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그리고 인사의 말이나 예배 순서를 적은 인쇄물에서 사용하는 명칭들이 이러한 음악의 기능에 관심을 보이도록 노력하라. 예를 들면, "찬양" 또는 "성가" 라는 명칭을 "고백의 기도 노래" 또는 "중보기도의 노래" 라고 표현함으로써 음악이 예배에서 어떻게 기능을 하는가 보이도록 하라. 둘째로, 말로 하는 기도와 노래로 하는 기도를 짝을 지어 함께 사용하도록 하라. 예를 들면 "오늘 우리의 회중 기도는 김XX 집사에 의하여 인도되는 기도로 시작하여 '나의 비전이 되소서' 라는 노래로 끝난다" 라거나, "우리의 죄 고백의 기도는 침묵으로 시작해서, 조용하게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를 부름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노래와 찬송을 기도로 체험하게끔 만든다.
11. 기도에 효과적인 지도자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의식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기도에 참여할 것을 추구한다. 교인들로 하여금 기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편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라. 이런 일은 말로 또는 음악으로 후렴을 반복하거나, 기도의 일부를 한 목소리로 읽거나, 다 함께 "아멘"이라고 응답함으로써 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12. 우리는 전통적인 중보기도의 형태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전통적으로 개인기도를 끝마칠 때 사용된 짧은 형태의 기도인 "기도 모음"은 개인 기도들을 하나의 연합된 기도의 형태로 모은 것이다. 이 기도는 다음과 같은 부분, 즉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속성이나 과거 행적에 대한 찬양, 간구 및 마치는 찬송과 아멘 등으로 된 탄탄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 모음"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은 찬양과 중보기도를 적절히 배합해놓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현재와 미래에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일해주실 것을 요청하기 이전에, 이 "모음"에서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일하신 특정한 방법을 언급하고 있다. 아래의 기도를 살펴보기로 하자:
"영원하신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불러 한 몸의 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이름을 찬양했던 사람들과 연합되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는 한 뜻과 한 마음으로 당신 교회의 하나됨을 보이게 될 것이며,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아멘."
여기서 하나님이 교회를 불러모으신 일을 인정함은 교회의 연합에 대한 간청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러한 탄탄한 논리적 구조는 하나님의 행위가 일관성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도 과거와 비슷한 방법으로 일하실 것임을 우리가 신뢰한다는 사실을 간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형태의 기도가 어린이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데 이상적이라는 사실이다. 유년주일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 질문하라(가령 "우리의 아픈 친구를 고쳐주십시오" 와 같은). 그리고 나서 그들의 요구에 맞는 찬양의 이유(가령, "당신은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와 같은)를 찾아볼 것을 요구하라. 그 결과 우리는 (별로 도움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기도가 만들어짐을 보게 된다: "주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를 죄와 병으로부터 고치시는 분으로 찬양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문둥병자들을 하나님께서 고치신 것 같이 오늘 우리의 친구를 고쳐 주십시오. 아멘." 만일 당신의 반 학생들이 찬양에 적합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기도의 이유를 들고 나온다면(예를 들면, "우리가 다른 팀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와 같은), 그들의 기도는 기도하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13.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주어진 하나님의 이름을 전체적으로 고루 사용해야 할 것이다.
14. 기도의 끝맺음은 단순히 진부한 문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당신과 함께 살고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한 축약된 믿음의 고백이다. 이러한 삼위적 예배 형식은 단순히 균형 잡힌 기도를 위하여 첨가된 수사적 미사여구가 아니라, 예배에서의 선포와 기도를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기회로 만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중보사역에 대한 인정과 감사의 축약된 형태인 것이다.
15.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은 기도 인도자에게 도움이 되는 수단이다. 당신의 손과 눈, 머리 등의 움직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살펴보라.
16. 마지막으로, 기도는 절대로(!) 어떤 첨가물이나 중간을 메우는 것, 또는 단순히 예배의 시작이나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 등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 성경 낭독과 예배의식에서의 "시간의 초월"
질문 : 매 주 예배시간에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읽는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읽는 신약의 내용이 구약 예 언의 직접적인 성취일 경우도 있지만, 어떤 때는 그 구절들이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도 있다. 왜 그런가?
답변 : 먼저 나는 당신이 매 주 신구약 성경을 읽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것은 교인들로 하여금 균형 있는 성경 읽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 읽기는 하나님께서 오랜 기간동안에 하시는 일들을 깨닫게 해준다.
구약과 신약 본문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읽을 성경을 선택하는 일을 흥미롭게 만든다.
어떤 구약의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에서 성취되었다고 믿는 예언들이다. 예를 들면, 구원자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약속(미가 5:2)은 마태 2:1에서 성취되었다(마태복음은 특별히 이러한 연관을 지적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 어떤 구약의 구절은 신약에 필수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가령 창세기 14장에서의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은 히브리서 6장과 7장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참고 : 히브리서 6-7장은 창세기 14장에 있는 예언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에 관한 신학적 설명을 위한 창세기의 역사적 설명에 의존하고 있다).
어떤 구약의 구절들은 좁은 의미에서의 예언은 아니지만 앞으로 있을 일들을 예시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광야에서 뱀을 든 일(민 21장)은 십자가에 그리스도가 달리신 일을 예시하는 것이다(요한 3:14이 이러한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구약의 구절들은 신약에서 제외된(심지어 반대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내용들이 있다. 가령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눅 6:35)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구약에서 원수들이 파멸하도록 기도를 한 시편 기자가 살던 시대와는 다른 시기에 있다고 느끼게 된다.
어떤 구약과 신약의 구절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구절들이 똑같이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일(창 12장)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경우에는 관주성경이 이 구절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두 구절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예배 때에 읽는 모든 성경이 약속의 성취와 연결되지 않은 것은 좋은 일이다. 만일 우리가 신약에서 성취된 구약의 약속만을 읽는다면, 우리는 구약의 많은 부분을 읽지 않고 남겨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바로 이것이 가장 많이 사용되어온 예배 지침서들에 대한 최근의 수정작업이 보여주는 중요한 점이다. 수정작업 팀은 예배에서 우리가 구약의 사용범위를 불필요하게 제한하고 있음을 (정당하게) 염려해왔다.
질문 : 나는 우리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옵소서" 라는 찬양을 부르는 것을 이 해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의 나라에 임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는가?
답변 : 이 말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최초로 한 말이다(눅 23:42). 오늘날 이 말로 찬양을 부르는 것은 유대교 및 기독교에서 시간에 대하여 생각하는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하는 데에 달려있다.
첫째로 우리는 종종 예배에서 생기는 "시간의 초월"을 알 필요가 있다. 예배에서 우리는 종종 성경 이야기를 다시 말하면서 우리 자신이 그 속에 있다고 상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2000년 전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라고 하는 대신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오늘 부활하셨다" 라고 노래하며, 크리스마스 때에 "오래 전에 탄생하셨다" 라고 하는 대신에 "즐거운 오늘 아침 탄생하셨다" 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의 유월절에도 마찬가지여서 유대인들은 "이 밤에,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구원하셨다" 라는 말을 암송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종려주일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행진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익을 때, 우리는 강도가 이 노래의 말로써 주님께 믿음의 기도를 한 것 같이 기도를 하도록 요청 받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기도에 우리 자신을 동일화 하기 위하여 이 말들을 가지고 노래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미 그의 나라에 들어가셨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이유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참고 : 이 노래는 이러한 성경 구절의 문맥에서 사용될 때 가장 적합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예배 드리는 사람들은 이러한 연결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둘째로, 우리는 많은 성경구절들이 미래에 여러 방면으로 성취됨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임하였고"(사 60:1) 라는 구절은 한 가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 구절은 더욱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한 번 오셨음을 알지만, "오소서, 오 임마누엘"이라고 노래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으로 이루어질 충만함을 바라보면서 지금 노래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게 될 때를 기대하면서 "예수여,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 영을 분별하는 일
a. 예배의식 변화의 시기에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방법
빌립보서 서두에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기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 1:9-11)
이 기도의 핵심에는 독자들이 분별력을 사용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심정이 있다. 바울은 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바울은 분별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세한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그는 분별력에 필요한 세 개의 기반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 지식, 그리고 통찰력("총명")이다. 그리고 그는 이 분별의 은사를 활용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거룩함과 의로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분별의 미덕은 사려 깊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활력과 능력을 제공하게 된다.
예배와 관련하여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도 바로 이 분별력이다. 이미 우리는 예배에 관한 열정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예배에 관한 많은 논쟁들은 그 기세가 감해질 징조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에 관한 견해들은 부족함이 없고, 또 사람들은 그것을 나누기 원한다. 우리는 또한 수많은 예배에 관한 자료들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서점, 잡지, 그리고 웹사이트 등은 교회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노래와 기도 자료, 그리고 예배 순서 등을 제공하고 있다. 예배를 위한 집회가 지난 10년 동안에 10배 이상 증가했으며, 심지어 복음주의적 신학교들에서도 마침내 교회 생활의 중심적인 이 예배활동에 관한 과목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정력과 자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그것들을 잘 이용할 수 있는 분별력이 부족함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사실상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분별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고백의 기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가 구체적이 되도록 돕기 위하여 필자는 이 덕목의 부족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 대부분은 칼빈신학교, 틴데일 신학교, 그리고 북부 침례 신학교에서 필자가 가르친 학생들에 의하여 제공된 경험들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한 그룹의 사람들이 성경구절로 된 합창을 반대 했는데, 그 이유는 그 교회에서 그것을 열 번이나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같은 그룹의 사람들은 성가대 지휘자에게 헨델의 "할렐루야"를 부를 것을 요청했다 (헨델의 노래들은 대부분의 마라나다의 노래보다 음악적 색채 및 힘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이론을 잘못 이용하는 것도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서는 이와 반대로 예배 인도자가 글로 쓴 기도의 사용을 반대했는데, 그것은 그 내용이 너무나 빤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배 위원회가 전에 있었던 예배들을 녹음한 내용을 들어본 결과 이 예배 인도자는 "즉흥적으로" 같은 말들을 네 번의 예배에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전에는 전통적인 찬송가들에 대한 지나친 사용을 반대했던 이 예배 인도자가 이제는 몇몇의 합창을 지나치게 사용하는 편이 되어 버렸다.
또 다른 교회에서는 교회 지도자 세 명이 예배와 전도에 관한 어떤 모임에 참여한 것을 근거로 해서 교인들과 한 달 정도 이 문제에 관하여 논의를 하거나 기도를 해보지도 않고 대폭적인 예배의 변화를 권장하고 추진하였다. 또 다른 교회에서는 교회 협의회(council)에서 성찬을 보다 자주 하자는 제안을 반대했는데, 그것은 그렇게 될 경우 성찬이 더 이상 "특별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러한 주장은 설교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헌신 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신학적 및 목회적인 균형감각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중요하고도 도움이 되는 입장들을 변호해왔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교인들이 분별력을 가지고 이런 일들을 논의하도록 도와줄 사랑, 지식, 또는 통찰력을 결여하고 있다.
b. 예배에서의 분별력
그렇다면 분별력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분별력이란 전통적인 덕목이요, 구약과 신약성경 및 고전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덕목은 단순한 사전적 정의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의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 분별력이란 솔로몬이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선악을 분별하게"(왕상 3:9)를 요청할 때 원하던 것이다. 또한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이 "마음을 새롭게 함"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하는 것을 돕는다고 했을 때에 논의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어거스틴은 분별력 또는 신중함이 "현명함을 가지고 무엇이 이것을 막고 무엇이 이것을 돕는가를 분별하는 사랑이며...신중함은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것이 이것을 돕고 어떤 것이 이것을 막는가를 바로 구별하는 사랑"이라고 말했다. 피퍼(Joseph Pieper)는 이것을 가리켜 "심사숙고 하는 진지함... 사고를 걸러내는 것"이며, "실체에 맞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완전하게 된 능력이며...윤리적인 성숙함의 골자"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스미데(Lewis Smedes)는 좀 더 구어적 표현을 사용하여 "표면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감지하는 능력을 소지한 상태"라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분별력이 좀 더 큰 범위를 가지게 되면 "지혜"와 거의 동의어라고 할 것이다.
이제 분별력의 구체적인 요소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분별력은 어떤 혁신이나 새로운 실천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분별력 있는 선택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사람, 어떤 동향, 또는 예배 형태에 관하여 공평하게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 가령 타이즈(Taize), 요나(Iona) 및 찬송가협회 등으로부터의 음악은 물론, 빈야드(Vineyard), 마라나타(Maranatha), 호산나 등으로부터의 음악을 그들의 책장에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분별력은 모든 것을 승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분별력은 적어도 이따금씩은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세대에서는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분별력 있는 예배 인도자들은 예배에서 따뜻하고 편안한 목소리를 개발하는 것이 겉발림의 말이나 경박한 말의 사용을 요구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분별력 있는 리더들은 따뜻함과 경박함을 구별하며, 후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아니오" 라고 답할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작용하기 위해서 분별력은 바울이 말한 대로 "지식과 완전한 통찰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예배 인도자에게는 영적인 성숙함과 주님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일에 자라나고자 하는 원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교회의 직임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은 그 기능에 있어서 교회 협의회 모임에 참여하는 것만큼이나 예배를 인도하는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예배의 인도는 좋은 의도 이상의 것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교회 안의 다른 사역이나 직업과 마찬가지로 소명(calling)이다. 성령께서는 이 사역을 위하여 몇 몇의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하여 이러한 은사들을 개발하며,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를 향한 도전이다.
평신도 예배 인도자의 성장은 아마도 예배에서 지난 세기동안에 있었던 가장 대폭적인 변화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매우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즉 이렇게 됨으로써 교인들이 예배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성도의 제사장"됨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평신도 지도자가 성경을 배우는 일에 헌신 되고, 예배를 위한 집회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거나 예배에 관한 새로운 책을 읽는 사람일 경우에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평신도 예배 인도자가 이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별 효과가 없게 된다. 사실 많은 예배 인도자들은 예배의 신학에 관한 책 이름 하나도 제대로 대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교단에서는 (훌륭하게도) 설교자들에게 설교를 하기 전에 어려운 신학 공부를 하도록 요구하지만, 예배 인도자들에게는 한 번의 연습 또는 위원회 모임에 참가하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 인도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 가운데 자라나도록 우리는 그들을 사랑으로 도전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분별력은 사랑을 요구하며, 이것은 예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칼빈도 이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이 예배 때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 칼빈은 어떤 예배 행위들은 각 시대의 문화를 수용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변화될 것을 보았으며, 따라서 급하고, 갑작스럽고, 아직 생각을 깊이 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변화를 경고하고 나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 것이 해를 가하고, 어떤 것이 덕을 세우는지를 가장 잘 판단하다. 따라서 사랑이 우리의 안내자가 될 때, 우리 모두는 안전할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사랑이 분별력을 돕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의 논의를 위하여 감상적인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논의는 오히려 장기적인 안목에서 교회를 건전하게 인도하는 예배행위를 추구하려는 강인한 사랑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예배의 경험에 대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간증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드럽고도 함께 느끼는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보다 빈번한 성찬 예식의 실시를 추진하는 사람들과 예배의 연관성을 논의하려는 사람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단순하게 묘사해버리고자 하는 태도를 반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분별력은 공동체 내에서 생기는 것이다. 앞에서도 살핀 바와 같이 바울은 "너희(모두)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라고 기도하고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이 2인칭 복수를 즐겨 사용했는데, 무엇이 최선의 것인지를 결정하게 될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한 것이다.
충성 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생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회로 하여금 조용히 개인적인 취향 이상의 것에 기초해서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모종의 영적 분별력을 소유한 지혜로운 사람들을 가지고 있는 축복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에 관하여 논의할 때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종종 그들의 목소리가 청취 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예배와 관련하여 우리가 최근 겪고 있는 충돌 배면에는 분별의 공동체적 측면을 무시해온 사람들에 의하여 이끌리고 있는 혁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가끔 교회 지도자들은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평신도들을 단순히 미래의 성장에 대한 장애로 보기까지 한다. 그리고 어떤 교회 성장 전문가들은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이런 사람들을 그렇게 보도록 권장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때로는 사랑과 지식이 없이, 즉 분별에 필요한 요소들이 없이 표현되기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과 지식이 공동체 내에 표현되면,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신의 신분에 맞도록 살게 된다.
필자가 예배 자체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고 사랑, 지식, 그리고 공동체에 관하여 씀으로써 예배에 관한 이 글을 시작한 사실이 당신을 놀라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이런 방식을 채택한 이유는 오늘날 예배에 관한 많은 논의들이 예배 그 자체보다는 세력, 정치, 그리고 개인적 취향에 관한 것이라는 필자의 확신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처방은 사랑 가운데 공동체 중심의 분별력을 추구하는 길이다. 우리는 분별의 은사를 위해 기도하고, 그것을 개발하며, 또한 사용해야 한다.
c. 사례 연구 : 신학적으로 분별하는 마음
오늘날 분별의 영을 요구하는 예배의 방면이 많다. 그러나 예배에서의 성령의 역할만큼이나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것을 분별의 은사를 적용하는 하나의 사례 연구로서 생각해보라. 어떻게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예배에서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오순절파와 기타 순복음 계통에서의 성령 사역에 대한 강조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전통이 예배에서의 성령에 대한 강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으면 아마도 당신은 놀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자요, 역사가며 목회자인 올드(Hughes Oliphant Old)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개혁주의 예배의 핵심에 있는 한 가지 교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론이다." 그리고 월필드(B.B. Warfield)를 포함한 수많은 칼빈주의 학자들은 칼빈을 가리켜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렀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는 기독교 전통들 사이에 공통적인 것이다.
더욱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예배와 관련된 부분을 읽게 되면, 당신은 성령이 예배에 관한 많은 중요 문장에서 주어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성찬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들어올린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우리가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히신다" 든지,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찬양과 기도를 하게 하신다" 등이 그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귀를 아무 효과 없이 울리지 않도록 하며, 성례가 당신의 눈을 아무 효과 없이 부딪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은 우리에게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이시며,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신다."
요약하자면, 성령은 예배에서 있게 되는 각각의 커다란 움직임, 즉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찬양 및 기도의 움직임과,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향한 말씀의 선포와 영적 은혜를 공급하는 움직임 모두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렇게 성령은 예배 시에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정확히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것을 완전히 설명하려고 하는 어떤 시도도 부적절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는가에 대하여 너무 정확하게 진술하려는 시도에서 물러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도움으로 우리는 언제 예배에서의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법이 왜곡되었는가를 결정할 수 있다. 아래에서 흔히 있는 세 가지의 문제들을 생각해보자.
첫째 문제는 우리가 예배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 했을 때 생기는 것이다. 얼마 전에 열렸던 예배를 위한 집회에 참석한 한 사람은 "성령과 관련한 모든 것들"에 대한 어떠한 말도 듣지 않은 것에 매우 만족한다고 발언했다. 이런 놀라운 언급에서 필자는 그 사람이 바로 삼위에서의 세 번째 인격이신 성령에 대하여 혐오감을 갖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선물인데, 우리는 이 선물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
두 번째의 문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단지 예배의 즉흥적이거나 황홀경의 요소에 제한 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즉흥적인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나 몹시 세련된 시편의 시 모두를 만들도록 성령이 성경 저자들을 통하여 역사 했음을 고백한다. 성령께서 초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방언을 말하도록 하셨지만, 그 성령께서는 또한 창조 때 혼돈 가운데서 질서를 이끌어 내셨다. 만일 성령이 질서와 즉흥성 모두를 통하여 일하신다면, 왜 우리는 어떤 때 성령에 대한 우리의 말을 즉흥적인 방면에만 제한하려 하는가?(가령 우리가 "우리는 이번 주 예배 계획을 세울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도록 해야 할 것 같다," 또는 "우리가 미리 계획한 예배를 벗어나서, 성령께서 인도하실 수 있도록 하자" 라고 무심코 말할 때와 같이 말이다.)
북미개혁장로교회 총회보고서의 하나인「변화하는 문화 속에서의 참된 예배」(Authentic Worship in a Changing Culture)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명확히 하고 있다:
"우리는 계획을 덜하고 정규절차를 덜 거치는 일에 성령을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성령은 매우 세밀하게 구성된 예배에 함께 하시면서 별 짜임새가 없는 예배에는 안 계실 수도 있다. 형태와 절차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예배의 행위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가?
실로 성령은 설교자가 조심스럽게 준비한 것이든지, 설교자가 계획하지 않은 몸짓이나 한 문장의 말을 통하여 일하실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성령께서는 또한 예배 위원회의 부지런한 계획을 통해서나 예배자의 즉흥적인 기도 요청 또는 간증 모두를 통해서 일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우리 자신이 성령의 체험을 일으킬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려는 유혹, 즉 우리가 어떤 방법을 통하여 성령의 일을 시작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혹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어떤 말이나 소리, 또는 움직임을 통하여 신의 행동을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술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사도행전 8:18이하를 참고하라).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예배를 예배 되게 만드는 역할의 주요 담당자로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강단에서의 뛰어난 말재주나 훌륭한 음악 그 자체가 예배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만든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은 명확하다: 즉 성령의 임재는 언제나 선물이며, 이것은 결코 조작되거나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 가지 유혹 중의 하나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거나(살전 5:19),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엡 4:30). 그러나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성령을 환영하며 높여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 예배를 예배로 만든다는 신학적인 주장은 (대부분의 중요한 신학적 요점과 마찬가지로) 예배의식에 직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교회 역사를 통하여 예배에서 성령의 활발한 임재를 위한 기도는 기독교 예배의 근본적인 요소가 되어 왔으며, 이러한 기도는 때때로 "초청"(invocation) 또는 "부름"(epicleses) 이라고 불린다.
이런 형태의 기도는 적어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는, 세례와 성찬을 위한 거의 모든 고전적인 예배의식의 형태에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이러한 유형을 가진 기도의 고전적인 예는 성경 낭독과 설교 전에 있었던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초청 또는 부름의 기도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주 하나님, 우리가 이제 체험하려고 하는 능력은 우리의 창조력이나 상상 또는 통찰력의 결과가 아니라, 순전히 선물입니다. 당신의 성령께서 이 성경 낭독, 이 설교, 이 성찬 예식을 통하여 능력으로 역사하시옵소서. 그리고 성령께서 일 하심으로써 우리가 이제 하려고 하는 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근래에 와서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성찬 예식을 좀 더 "생기 있게 만든다"는 명목으로) 전통적인 예배의 기도 형태를 폐기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즉흥적인 방법가운데에 성령의 일하심을 위한 기도를 포함시키지 않게 되었다. 또 어떤 다른 사람들은 배타적으로 전통적인 형태에만 의존하지만, 이러한 부름의 기도가 가진 능력, 아름다움, 탁월함 및 복음을 선포하는 진리에 대한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접근 방법들은 예배의 주된 요소 중의 하나를 빼놓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에서 행하는 것들을 어떻게, 그리고 왜 하는가를 신학적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성의 예가 바로 여기 있다. 성령의 활발한 임재를 위한 사려 깊은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기대와 소망의 자세를 갖도록 한다. 즉,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심을 기대하도록 초청하며, 또한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믿음 및 구원 자체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들이 이루는 것이라기보다는 선물로 받는 것임을 깨우침으로써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께서 예배에서 활동하심을 알 수 있는가? 무아경이나 엄숙함 그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지만, 성령은 이 모두를 사용하실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의 일하심을 알 수 있는 하나의 힌트는 우리가 예배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아래에서 예배 후에 하는 말들이 가진 차이점들을 생각해보자: "와, 오늘 음악이 인상적이었습니다"하는 말과 "찬양 인도자님, 오늘 제가 더욱 깊이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 그리고 "아주 멋진 설교였습니다" 하는 말과 "이 예배에서 저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비교해보라. 성령이 가진 성격에서 주된 특성 중의 하나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의 인격에 대한 목격자요 변호자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의하여 위로를 받고 도전을 받으며 예배를 떠났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일하심에 감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영을 분별"하는 사람들이 갖는 통찰력이다.
d. 일에서의 분별력 : 교회 생활로부터의 예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의 분별력의 예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최근에 몇몇의 교회에서 생긴 예들을 고려해보자. 실제로 아래의 어떤 글도 이러한 상황의 복잡함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필자는 이러한 예들이 이 주제에 대하여 우리의 기본 입장보다 더 깊이 들어가 살피는 것이 중요함을 제안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령 분별력 있는 어떤 리더는 공개적으로 구도자(seeker)를 위한 예배의 성장을 연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즉 이러한 대중적인 전도 행사들은 우리에게 전도에 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만, 그것들은 말씀과 성례의 예배를 대치할 수 있는 적절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의 결과로 교회는 매주 말씀과 성례의 예배를 드리며, 또한 교인들이 보기에 일종의 가벼운 예배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갖는 믿음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고자 하는 강력하고도 깊이 헌신된 시도로서 정규적인 전도 행사를 갖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이제 막 예배에 관한 과목을 마친 어떤 예배 인도자는 자신의 교회에 기독교 달력(calendar)에 따른 행사를 다시 도입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인도자는 분명치 않은 절기인 동방박사의 경배일(Epiphany)과 같은 것을 소개하기보다는 자신 주변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된 "일년 내내 예수와 함께 하는 영적 여행"인 달력을 제시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달력에서 표시하는 신학적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어떤 분별력 있는 교회 음악 담당자는 증가하는 추세에 대하여 열려있는 마음의 표식으로서 근래에 발간된 찬양 합창곡 세 권을 구입해서 (마치 찬송 위원회가 찬송가에 넣기 위하여 현존의 찬송가들 중 10퍼센트를 조심스럽게 선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연구하여 그 중에 가장 좋은 10퍼센트 정도의 음악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다른 교회는 성찬을 보다 빈번하게 실시하기 원해서 일 년 중 달력 자체에서 지정하는 날(예를 들면, 매 월 두 번째 주일 저녁)보다는 그리스도 중심의 주요 축하행사 때(성탄절, 부활절, 승천일 및 오순절)마다 성찬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은 교인들로 하여금 이러한 변화가 성례에 대한 어떤 특정한 입장에서의 요구로부터의 결과가 아니라, 구원 역사에서의 주요 행사들에 대하여 가장 적합하고, 아주 성경적인 반응임을 보게끔 만들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 성장과 예배에 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집회에 교회 대표들을 파송했다. 그들이 여러 개의 변화를 위한 제안서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교회는 (제안된 모든 변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기도와 토의의 과정을 시작함으로써 교인 전체로 하여금 어떤 생각은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다른 생각들은 제외하도록 하였다.
어떤 교회는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및 남아메리카의 노래들을 유입함으로써 교회 음악의 곡목 수를 (거룩하고, 우주적인 교회에 대한 의식과 함께) 확대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러한 노래들을 특별한 예배 때에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대신에 이 노래 중 하나 또는 둘을 매 예배 때에 예배의 응답으로 추가 시켰다.
어떤 교회는 청소년들을 보다 완전히 예배에 참가 시키기를 원했으며, 따라서 중고등학생 예배를 일년에 한 번씩 어른 예배에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중고등학생 하나를 안내자, 예배팀원, 또는 매 주 성경낭독자로 참여 시키고,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중고등학생들에게 정규적인 훈련을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어떤 교회는 평신도 예배 인도자들을 추가 시키기 원했지만, (그들의 상황에서 볼 때) 분열의 가능성이 있는 예배 팀을 추가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고 평신도 성경 낭독자들을 구성함으로써 시작했는데, 그들은 매 주 그 다음 주일 예배 때의 성경 읽기를 연습하기 위해서 만났다. 그 결과 성경 읽기에 진지하고 적절한 극적인 효과를 낼 수 있게 되어서, 모든 교인들이 예배의 순간을 고대하게끔 이끌었다.
한 교회는 세 팀의 예배 인도자들을 한 번에 추가했으나, 지혜롭게도 그들에게 예배의 신학과 실천을 훈련하게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상의 몇몇의 교회들은 분별의 은사를 발전시키고 있는 지혜로운 목회 지도자들을 소유하는 축복을 받은 교회들이다. 이 사람들은 예배에 관한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한 환경을 창조하는 사랑, 지식, 그리고 공동체를 추구한다.
이러한 예들, 그리고 이 글은 모든 종류의 어려운 문제에서 중간지점을 선택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의 요점이 아니다. 필자의 요점은 이러한 논의에 실제로 어떤 것이 달려있는가를 보게 하며, 요점에 초점을 맞추게 하고, 바울 기도의 핵심에 있는 미덕, 즉 분별력을 본받는 방법들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위에서의 예들은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즉, 각각의 예에서 분별의 은사는 예배의식에 대한 견해와 예배 그 자체에 대하여 교인들이 혼동하는 것을 막는다.
예배의식에 관한 우리의 모든 논의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의 위험은 우리가 예배에 관하여 말하는 것에 너무 집중하여 실제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는 일이다. 그러나 예배는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을 즐겁고도 열린 마음으로 들음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성찬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적 양식을 주린 심정으로 받아먹는 것이다. 이것은 정직하고도 풍성한 찬양을 거룩하고, 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 드림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정직한 고백과 (때로는) 애통에 관한 것이다. 예배에 관한 우리의 논의가 이보다 못한 것으로 끝날 때 (즉 그 논의들이 예배의 형태에 관한 질문들에만 집중되고 말았을 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마음속으로부터의 경배로 우리를 다시 불러들일 분별력 있는 지도자들이 필요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분별의 행위는 하나의 도구요,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한 방편이요,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의의 추수를 이룸으로써") 순수하고 흠 없이 되도록 돕는 길이다. 우리가 이 은사를 사모하고 개발함으로써 하나님을 높이며, 그리스도 중심이요, 성령에 의하여 영감 되어진 예배에서 열매 맺는 것을 보게 되기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